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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드림 Nov 21. 2021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쓰는 이유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고

나는 지지 않겠다 @@mbrunacr, Unsplash


사회적 약자가 이 세상과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희진 여성학자는 글쓰기라고 얘기한다. 죄의식 없이 가해자가 마음이 더 평화로운 세상. 사회적 약자에게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라고 되묻는 세상에 지닐 수 있는 무기는 오롯이 글쓰기라고 한다. 그들과 연대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일, 이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나타낸다. 적들은 가지 수 없는 사고방식과 약자로서 가능한 대안적 사고, 그리고 내게만 보이는 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 귀 열어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우는 그런 책이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1991년 이 시를 썼을 당시 안도현은 전교조 해직 교사였다는 저자의 소개와 해석을 읽고 반전이 일어났다. 그가 옳았다. 그의 정보 덕분에 이 시는 나의 시가 되었다. 이 시의 제목이 〈너에게 묻는다〉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시인을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각하거나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런 축이다. 시는 언어들의 언어,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왜 잘났겠는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골목길 네가 치울 거냐」 중에서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마라! 라 잘못 알고 있었던 시의 제목은 <너에게 묻는다>였다. 은유법으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 시인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에 대단하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 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라는 생각은 현실과 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 하냐」 중에서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다양하다. 이동, 관계, 투쟁을 나타낸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하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만이 그들을 나타내는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또한 그렇다. 공부는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기존의 인식 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약자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 공부나 글쓰기가 그들의 존재를 나타낸다. 


자녀의 죽음, 전쟁에서의 생존, 홀로코스트, 집단 성폭력, 지진……. 정말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통만 주실까. 인간은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이는 어떤 조건에서만 맞는 말이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상부상조와 이를 지지하는 사회. 이것이 정의다. 「이타적 인간」 중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인간이 갖지 못한 건 희망이란 사실이 맞는가? 정말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고통만을 줄까? 아니면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가? 고난을 견디는 능력은 인간의 본성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위고하고 공감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뉴스를 보면 우울한 기사를 보면서 분노하기 시작한다. 한 언론사가 분노의 기사를 퍼부으면 너도나도 비슷한 기사들이 즐비한다. 어떤 소식 하나로 하루 종일 마음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 요즘은 돈쭐을 낸다는 말이 유행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의 사비를 털어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을 보고 돈쭐로 혼내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은 쉽게 흔들린다. 나쁜 기사에 마음이 우울하기도 하고 또 좋은 기사에 마음이 동해서 누군가를 손쉽게 돕기도 한다. 나 자신이 위로를 받았다는 게 이런 거일까?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회 부족한 사회라지만 이타적인 인간이 없다고 치부하는 것도 이기적이지 않은가?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 고통받는 인간은 선택받았다. 누구도 이런 선민이 되고 싶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조건인 것을. 다만, 사회는 이들에게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라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 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중에서


인터넷이 발달하고 댓글을 순식간에 남길 수 있게 된 이후로부터 누구나가 익명을 바탕으로 모르는 상대에게 지적질을 한다. 모순적이게도 힘이 없는데 힘을 내라고 한다던가 보고 싶어 미칠 거 같은데 잊으라 한다던가 참고 있는데 더 참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미 분노하고 있는 사람에게 분노가 많냐고 되묻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겪은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전히 다른 이의 감정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의 분노를 손쉽게 판단하질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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