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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드림 Nov 21. 2021

여름의 빌라는 어떤 곳일까?

《여름의 빌라》를 읽고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백수린의 글이다. 대체 불가능한 아름다운 문장과 섬세한 플롯으로 문단과 독자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온 그녀.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한 글들이다. 2016년 여름부터 2020년 봄까지를 갈무리한 이야기 속에 인생의 여름 안에서 마주하는 불가해라는 축복이 우아한 생의 이면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제 백수린의 소설은 두 팔을 뻗어 자신이 스스로 단련한 근육을 통해

모어와 모국, 모성의 세계의 불균질함까지 나아간다. _김금희(소설가)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P.39 「시간의 궤적」 중에서



비가 오는 날이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우산을 써봤자 소용없는 비인데도 빗속으로 들어오라는 언니의 손짓. 폭우 속을 마음껏 달린다. 우산을 쓰나 마나 한 날 물이 고인 곳을 첨벙첨벙 뛰어다니다 보면 온몸이 젖게 된다. 그래도 행복하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 빗속을 뛰어다니는 것도 하나의 기억이자 추억이라고. 비도 곧 그치게 된다. 쨍쨍하던 해도 저녁이 오면 지게 된다. 세상 어떤 일이던 오고 가는 게 있고, 주고받는 게 있다. 생각지도 못하게 왔다가 떠나보내는 것도 있으니 참 살면 살수록 영원한 건 없다는 생각이다. 




여름의 빌라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p.68 「여름의 빌라」 중에서



기나긴 세월을 버틴 나무를 보면 존경의 의미로 고개까지 숙여진다. 저 숱한 세월을 어찌 버텼을꼬? 비바람, 싸리 눈, 강풍, 태풍, 찌는듯한 더위를 모두 거쳐 저렇게 푸르른 걸 보면 버티는 게 강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일까?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는 나무. 그 뿌리가 깊고 깊어져 주변에 무너져 내리는 사원마저 지켜보는 나무를 볼 테면 누군가의 삶은 마냥 순탄치 않았겠구나를 느끼게 된다. 




“엄마한테는 세상에서 연애가 가장 중요해?”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취업보다야 연애가 훨씬 중요하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데.” p.135 「폭설」 중에서


연애를 하지 않는 요즘 세대들은 사랑이 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사랑을 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대상이나 사물에게 사랑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을 주기도 한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그때의 그 순간. 취업보다야 연애가 더 중요하지 않은 요즘, 폭설이 내리는 어느 날 엄마는 딸에게 이야기한다. 그래도 연애가 더 중요해.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우리의 맨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 p.254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중에서


바쁜 세상에 살다 보면 자연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보기가 힘들다. 도시에서 나비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고층 건물 사이에서도 날갯짓을 하고 있는 나비를 만날 수 있다. 소설이나 스토리가 사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이야기를 통해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이입되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또 평소라면 하지 못할 험한 말과 폭행을 감행하는 악당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될 수 있다. 나와 그의 첫 입맞춤이다. 


참으로 평안한 소설이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던 것일 뿐. 그녀의 소설 속의 화자들은 약하거나 여리지 않다. 기민하게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손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이행하려는 행보를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수도 없이 흔들리지만 고요한 열정만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동반하게 된다.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도 중 그녀의 섬세한 문장으로 더 촘촘하게 직조한 세상을 만나게 된다. 

상서로운 눈이 내린다던 소설에서 소서의 여름의 빌라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만 이렇게 찬찬히 기록해 잡아두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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