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그 괴짜가 되었다니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바다마을 공진에는 동네 사람들이 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는다. 동네 주민들은 문이 잠기지 않는 집을 제집처럼 들어가서 마룻바닥에도 눕기도 하고 밥과 반찬을 꺼내 먹고 수다를 종일 떨기도 한다. 문을 잠그는 건 공진 마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동네 누구나가 자기 집인 양 드나들고 또 서로의 일인 양 귀 기울이고 도와주는 것이 이 갯마을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갯마을 공진 사람 중 한 명이 친척이 사는 서울에 들어설 테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이곳에서는 문을 걸어 잠그기 바쁘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즐비한 아파트촌은 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공동현관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현관이라는 두 번째 철문은 실거주자만 아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빗장을 걸어 잠근다. 혹여나 집주인과 대화하려면 눈보다 작은 구멍으로 이방인을 흘깃 보며 "거기 놓고 가세요."라며 싸늘한 말만 오갈 뿐이다.
공진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거 사람들 참 정 없네. 그러니깐 서울깍쟁이란 말을 듣지. 아니 서로 나누고 밥도 주고 재워주고 해야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쯧쯧..'이라며 정 없는 도시 사람들의 행동에 혀를 끌끌 차기 바쁠 것이다. 허나 서울 사람들이 공진을 가면 놀라 자빠질지도 모른다. '아니 이 사람들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문도 안 잠그고 음식은 물론, 자리까지 내어주는 거지? 아무리 동네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경계해야 하는 법 모르나? 범죄는 대부분 면식범인데 말이야.. 하늘이 깜짝 놀라 자빠지겠군.'라며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이 둘 중 누구 하나가 잘못된 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 환경에 속해 있으면 그 세상이 전부인 줄 안다. 잠시라도 발걸음을 옮겨 조금이라도 떨어져 바라보면 또 다른 하나의 세태일 뿐이다. 그 주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그곳의 풍습과 분위기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가니 아들이 보고 듣는 것이 상여와 곡성이어서 따라 하는 것이고, 저자 근처로 집을 옮기니 장사꾼 흉내를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게 된다.
책 『그릿(GRIT)』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연습을 하러 가는 곳에 들어가면 누구나 그렇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괴짜들이 매일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수영 연습을 하러 가는 거야?'라 놀란다면 새벽 4시에 수영장을 가보면 된다. 그 분위기에서는 꼭두새벽에 모여 수영 전 체조를 시작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싶다면 내가 변하고 싶은 모습의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누가 그렇게 수영장으로 달려가느냐라 생각하지만 그곳으로 향해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면 나 자신도 어느새 따라 하게 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 물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체조를 하는 일이 별일이 아닌 것 같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또한 몇 번 해보면 몸도 금세 적응한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담그게 되면 어느새 나도 그 괴짜가 되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