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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드림 Dec 11. 2021

사장 돋움체

디자인 천재 속옷가게 사장님

이런 게 여기 있었나?


서울에서 서울 내로 가는 출근길은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대중교통을 하나만 탄다면 잠시라도 눈 붙이기 좋으련만.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야 하는 출근길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보인다. 이 고행길을 걷는 동안 누군가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다들 바삐 움직이고 있다. 내 몸은 플랫폼 3-4의 지옥철에 올라타 매일 같은 문에서 내리고 계단을 올라가 카드를 찍는다. 개찰구를 바삐 통과하면 인파가 몰리는 에스컬레이터에 잠시 몸을 실은 후 의욕 없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로봇 인생이다.


다음 목적지는 정신없이 혼잡한 버스정류장이다. 멍 때리며 버스가 오고 있나 지켜볼 때쯤 매일 같은 곳에 서 있던 내 눈에 미쳐 눈길 주지 못했던 글씨들이 보였다. '이게 여기 계속 있었었나?'라 생각할 때쯤 바닥에 붙은 테이프와 바래진 종이를 보니 꽤 오랜 시간 여기 있었지만 그냥 흘겨보고 지나갔던 것 같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씨 한 자 한 자마다 누군가의 영혼을 꼭 닮은 획이 살아 숨 쉬며, 디자인에서 중요한 보이지 않는 선, 그리드를 잘 살린 감각적인 글씨체였다.


네모 틀에 맞춘 활자체가로 세로 굵기가 거의 같으며 돋보임용으로 쓰는 돋움체 같았다. 가만 보니 이 사장님의 글씨체와 단어 선택은 정말 천재성이 돋보였다. '사장님 참 글씨 잘 쓰시네.'라 감탄할 때쯤 제품의 장점을 가득 담아 만든 문구에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번만 읽어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캐치프레이즈와 디자인 감각만약 가게의 문이 열려 있었다면 '여기 사장님 누구세요?'라고 물어봤을 것이다.

돋움체: 한글 활자체 가운데 하나. 1960년대 사진 식자 판 짜기 네모 틀에 맞춰 만들어진 활자 꼴로 줄기의 부리가 미세하게 있으나 대개 가로 줄기와 세로 줄기의 굵기가 거의 같으면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다. 각종 표지판, 신문, 서적 등의 돋보임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돋움체




순면빤쓰 천원 ⓒ속옷가게 사장님 '사장 돋움체'

순면빤쓰

 천


식물성 섬유의 대표주자로 몸에 자극이 적고 흡습성이 좋은 면 100%를 자랑하는 순면을 소개하는 글씨가 가장 눈에 먼저 띄었다. 팬츠(pants)를 일본어로 표기한 パンツ(Pantsu)는 외래어 표기법이다. 그러나 빤쓰라고 하면 누구나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통용화된 단어이기도 하다. 사자성어처럼 들리는 '순면빤쓰'는 순면인 빤쓰가 천 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단숨에 고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세히 보니 '사장 돋움체'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포용성까지 갖추었다. 사장님의 필체에서 'ㄴ받침'은 물결 흐르듯 쓰시는데 이 '순면빤쓰'는 돋움체 디자인을 맞추기 위해 'ㄴ받침'을 정 받침으로 썼다. 혹여나 빤쓰를 팬티라고 했다면 '티'에는 받침이 없기에 디자인상 불편함을 느꼈을 터인데, 적절한 단어 '빤쓰'를 선택한 영재성까지 엿보인다. '순면빤쓰'라는 어휘 선택은 제품의 장점을 그대로 드러낸 최고의 선택이다. 또 중요한 정가 '천원'이라는 단어는 순면빤쓰보다 크기를 더 키우고 사장님의 글씨체인 '물결 ㄴ받침'을 고수해서 시선을 집중시킨다.


감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닥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 보기에 적절한 장소에 광고물을 부착했으며, 테이프도 허투루 붙이지 않고 디자인을 감미했다. 우선 가로세로 가장자리에 따라 테이프를 붙인다. 이후 한가운데 점을 기점으로 십자가 모양으로 한번 더 붙인 다음, 겨울철 부는 강풍을 고려해 엑스자로 단단히 고정을 한다. 그리드 만들어지고 나니 '사장 돋움체'가 더 돋보이기 시작했다. 네모 틀 없이도 올곧게 쓴 글씨는 디자인과 글씨체의 혁명임에 틀림없다.




ⓒ속옷가게 사장님 '사장 돋움체'

BYC TRY

만져보고

느껴보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입어봤을 법한 BYCTRY 브랜드를 큼지막하게 써놓아 브랜드 이름을 강조했다. 사장님은 브랜드의 영향력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인 듯하다. 만약 한글로 나타냈더라면 '비와이씨'와 '츄라이'로 쓰셨을 텐데 그러면 글자 수가 맞지 않기에 영어로 쓰는 센스를 발휘하셨다.


온라인으로 옷 구매가 쉬워진 만큼 섬유의 감촉이나 질감을 만져보기 쉽지 않은 요즘,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고객 직접 체험을 통한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역시 옷은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는 촉각을 발휘해 사야 하기 때문이다. 고객과의 접점에서 느낀 바를 그대로 적용시킨 사장님의 고객 체험 현장의 연륜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만져보고 느껴보소' 운율은 수학적이자 미학적으로 리듬이 절묘하다. 과거 시험이라면 문과에서 갑과에 수석으로 합격하는 장원급제감이다.





ⓒ속옷가게 사장님 '사장 돋움체'

싼 거 X

좋은제품
싸게싸게


여느 사장이 그렇듯 자기 가게와 제품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날 것이다. 그 자부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구 또한 운율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싸구려 제품이 아니라 좋은 제품을 싸게 팝니다.'라 쓸 수도 있으나, 바쁜 세상 바삐 지나가는 잠재고객눈에 빠르게 띄게 하기 위해 압축다. 요즘 아이들이 하는 '별다줄(별걸 다 줄이는)'을 이미 알고 있는 트렌드세터임에 분명하다.


질이 안 좋은 싸구려 제품이 아니라는 점은 붉은색 X 정확하게 표시했다. 그 대신 좋은 제품을 싸게 파는 자부심을 내보인다. '싸게싸게'는 전남 방언인 '싸게 싸게'로 빨리빨리의 뜻과 헐값에 가져가라는 이중적 의미를 모두 담았다.


영어로는 라임(rhyme)이라 불리는 압운은 유사한 발음 또는 리듬을 이용한 수사법이다. 리듬감 형성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일상생활에서는 개그를 칠 때나 노래 또는 힙합의 랩 가사에도 많이 사용된다. '싼거 ~ 싸게싸게'는 'ㅆㄱ'가 반복되는 자음과 운율 절묘한 조합이 돋보인다. 라임 4대 천왕인 한국 힙합 계열에서 라임으로 유명한 래퍼 화나, 피타입, 4WD, 버벌진트가 무릎 꿇어야 할지도 모른다.



출근길에 마주한 디자인과 카피라이트 천재 사장님의 '사장 돋움체'를 보고 소름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종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기 위해 얼마나 고뇌하셨을 테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담으려 명품 글씨체를 새기는 장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쉽게도 반대편 길로 퇴근하는 터라 문이 열릴 때 방문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 덕분에 멍하게 출근하는 고행길이 이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쓴 '사장 돋움체'를 볼 생각으로 신나기만 한다. 다음번엔 기모내복 한벌 set를 구입하면서 "바깥 카피 문구와 글씨체가 눈에 띄어서 들어왔어요."라 얘기하며 감탄을 안겨 준 사장님께 돈쭐로 감사함을 표하려 한다.

완판 하세요 사장님! ⓒ속옷가게 사장님 '사장 돋움체'


<참고 자료>

- 돋움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84164&cid=41828&categoryId=41828

- 라임 https://namu.wiki/w/%EB%9D%BC%EC%9E%84(%EB%8F%99%EC%9D%8C%EC%9D%B4%EC%9D%98%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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