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 때 나는 사주를 본다. 뭔가 정해져 있는 운명을 몰라 내가 이렇게 불편하고 화가 나는 건지에 대해 곱씹어보고 또 사주를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해야 할까? 사주를 봐본지 꽤 오래되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내 성향을 잘 파악하게 되고 점을 잘 보는 집인지 못 보는 집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우선 내가 나의 성격을 확연하게 잘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안 맞는 얘기가 들리면 듣는 척은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 선을 긋고 돈 날렸다 생각하고 안드로메다로 여행한다.
사주풀이로 나오는 공통된 성향으로는 역마살이 있다, 남자복이 없다, 남 밑에서 일 못한다 등이 있다. 대부분 답답해서 점을 보는 이유 중 하나가 일하는데 답답해서인 회사문제다. 일적으로 왜 이렇게 안 풀리지? 하고 보면 다 부딪치는 게 사람이나 관계의 문제가 대부분이다. 이런 꼰대 조직 내에서 내가 이 조직을 바꿀 수 없으면 수그리고 굽히며 맞춰야 한다. 아님 절이 싫은 중은 짐을 싸서 하산해야 한다. 그게 맞지 않겠는가?
절이 싫으면 광명 찾아 짐 싸고 하산해야지 @jan_huber, Unsplash
어제도 사주를 한번 보았다. 사주가 세고 남 밑에서 일을 못한다고 한다. 익히 기대했던 바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나는 한 조직에서 12년째 근무 중이다. 남 밑에서 일 못하는 사람인데 남 밑에서 기어이 씹다 버린 풍선껌처럼 찐득하게 버티고 있다. 물론 속 터지는 순간도 많았다. 왜 저렇게 일을 하지? 왜 저런 말을 하지? 왜 저런 태도로 회사생활을 하지? 하면서 동료와 술 마시며 풀려고도 해보고 다른 취미를 가지려고도 해보고 퇴사하려 다른 직장 면접도 보고 했으나 12년째 이 직장으로 여전히 출근한다.
저런 사주풀이를 들을 때면 '그래, 참 고생했다. 이렇게 남 밑에 못 있는 사람이 이렇게나 버티다니. 오늘은 나에게 보상을 줘야겠다.'라는 찰나의 자기 위로 순간이 온다. 생각해보니 그저 남 밑에 있는 걸 못하는 것도 맞다. 멍청하고 부지런한 멍부 상사가 오면 답답해서 나 혼자 일을 다 한다. 그리고 위에 가서 설득시킨다. 이게 이런 이유로 맞고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겠다고 한다. 물론 부딪칠 때도 있지만 어느 정도 된 짬밥과 몇몇 가지 업무를 성공시킨 사례로 상사는 믿어 준다. 아님 그저 귀찮고 책임지기 싫어서 믿어주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존버한 세월이 흘러 12년 차가 된 것이다.
책들이 바로 경험이다. 그것은 사랑이 주는 위안, 가족의 성취, 전쟁의 고통, 기억의 지혜를 입증하는 저자들의 말이다. 기쁨과 눈물, 즐거움과 고통, 모든 것이 보랏빛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내게 왔다.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그토록 많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니나 상코비치《혼자 책 읽는 시간》
10여 년이란 긴 세월을 인연(또는 악연)으로 만난 이 직장은 그저 돈을 벌러 다니는 곳만은 아니었다. 여느 첫 설렘처럼 사회로의 첫 발걸음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으로 한동안 행복에 겨웠던 시간도 있었고, 끊임없는 업무와 야근으로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하는 건지 신께 묻기도 했다. 때로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끝없는 쳇바퀴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의 입사와 경사를 함께 축하하고 또 조사에는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인연이 크게 닿지 않는 누군가의 퇴사나 퇴직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나 아쉬움과 함께 먼저 떠나보내기도 했다.
하루하루 지독하게도 시간이 가지 않는다 한탄하다가도 어느새 분기와 일 년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지 한 게 없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긴 시간 동안 이곳은 나에게 안정이 주는 위안, 성취, 전쟁의 고통, 기억의 지혜를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기쁨과 눈물, 즐거움과 고통을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그토록 많은 것을 경험한 것이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의 감정이 어우러지고 내게 온전히 흡수되어 지금의 나, 그리고 나의 삶을 이루었다. 남 밑에서 일 못하는 성격이지만 여기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 헤어지지 못하는 회사, 떠나가지 못하는 직원,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우리의 관계로 끈질기게 붙어있다.
헤어지지도 못하고 떠나가지도 못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nadineshaabana,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