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2018)>를 보고서
영화는 내게 치명적이다. 영화를 보면 한동안 그 영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영화를 주제로 글을 쓰려다 보니 영화를 고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번아웃에 좋은 ‘저자극·유기농’ 영화는 없을까. 검색을 거듭하니 <리틀 포레스트>가 추천리스트에 올라왔다. 진짜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영화일 줄은 몰랐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다짐하고 영화를 봤는데 또 생각이 많아진다. 힘들었던 서울살이가 떠올라서 싱숭생숭하다. 특히 “배고파서 내려왔어.”라는 주인공 혜원의 대사가 과몰입을 유발한다. 이래서 영화는 잘 안 보는데 말이야. 혜원과 내적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늦었다. 이미 나는 서울에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한 이십 대가 되었다.
세상천지는 아쉬움 투성이다. 특히 대학교 신입생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는데 주머니가 빈궁하면 아쉬움은 배가 된다.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도 빠듯한데 동기며 선후배를 만나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친구랑 안면을 유지하려면 밥도 먹어야 하고, 돌아오는 생일마다 선물이라도 하려면 ‘우정비’가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교우 관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친구가 없었으니 결국 들은 사람도 없을 테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하루가 짧다는 사실도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결국 시간도 돈이다. 아르바이트랑 공부를 병행하면서 남는 시간에서 먹고 자고 씻으면 도대체 언제 삶의 낙을 찾아야 할까. 그나마 맛있는 걸 먹고 좋은 환경에서 푹 쉬면 좋겠지만 서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의식주는 뭐 하나 어긋나기 시작하면 자신을 갉아먹는다. 실내에서 말려 쿰쿰한 옷가지와 지겨운 인스턴트 도시락, 곰팡이 핀 벽지와 기별도 없이 찾아오는 벌레 선생님들이 가뜩이나 내달리던 번아웃을 부채질한다. 어느 순간부터 서울이라 하면 아등바등 삶을 지탱해야 하는 괴롭고, 외로운 곳이 되어 있었다. 결국 척박한 회색 토양에서 나를 뽑아 녹음이 푸르른 고향 땅으로 옮겨 심었다. 미련도 후회도 함께.
혜원은 밭에서 나는 작물을 따라 사계절을 요리한다. 눈 내린 밭에서 눈 맞은 배추를 뽑아 배추 된장국으로 야무진 한 끼를 먹고. 화로 옆에 누워 식곤증을 만끽한다. 비로소 고향에 내려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여유다. 서울에서는 할 수 없었을 그녀만의 진정한 휴식은 ‘먹고 바로 눕기’로 시작한다. 대지의 정령들이여 내가 왔노라. 뜨끈한 방바닥에 파고들어 고향 땅에 자신을 심는 신고식이다. 스르륵 감기는 눈.
시골의 삶은 부지런함을 ‘종용’한다.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지언정 게으른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눈을 뜨자마자 수제비를 반죽하고 숙성되는 2시간 남짓을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운다. 눈삽으로 귀향하며 마음에 담아온 번뇌를 밀어낸다. 눈도 번뇌도 완벽하게 치우지 못했다. 재워둔 반죽으로 뜨끈한 수제비를 끓이고 속도 좀 끓인다. 남은 배추로 배추전을 만들어 남은 겨울을 요리한다. 먹는 동안은 추위가 가시고 속이 든든하다. 위장이 아닌 마음으로 삼키는 영화랄까.
그녀의 요리는 맛있음이 화면을 뚫고 나온다. 다만 농촌답지 않은 화려함이 묻어있다. 농촌이라고 팬지꽃을 따다가 파스타를 해 먹지 못할 것은 없다만, 실용적인 느낌은 아니다. 요리할 때도 도시에서 데려온 미련도 후회를 버무리는 느낌이다. 늘 혜원은 요리를 하면서 기억 속 엄마와 대결하는 느낌을 받는다. 엄마의 레시피와 혜원의 레시피의 차이는 ‘단호박으로 정성 들여 맛을 내느냐, 아니면 소금 한 꼬집으로 감칠맛을 내느냐’ 만큼의 차이다. 다시 말하면 딸아이와 함께 내려와야 했던 엄마의 책임감과 그녀 홀로 내려와 자신을 지탱해야 하는 책임감만큼의 차이다.
그녀의 농사를 지켜보면서 친구 은숙이 되고 싶었다. 먼저 서울에서 내려와 농사 전문가 자태를 뽐내는 친구 재하의 바삭함도 좋았지만, 요리도 농사도 서툴러도 혜원의 마음은 잘 보듬는 은숙의 싱그러움이 더 좋았다. 재하는 직장 상사의 지나친 갈굼에 자리를 박차고 내려와 혜원보다도 먼저 미련과 후회를 고향 땅에 묻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혜원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보다는 명쾌하지 못한 태도를 은연중에 답답해한다. 방치하고 내려온 수험도, 끝내지 않은 연애도.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돼?”냐며 겨우 아물어가던 혜원의 가슴을 콕콕 찌른다. 가을날 밤송이처럼 가시를 가득 세우고 혜원을 대신해 외쳐주고 싶다.
“너는 부모님께 물려받을 농장이며, 과수원이라도 있지 짜식아! 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만 내려왔단 말이야!”
혜원은 그러지 않았다. “빨리 올라가서 먹고살 궁리를 해야 하는 건데 그지?”라며 반문했을 뿐. 계절을 따라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며 평온하게 풀려가던 영화에서 조차 느껴지던 일말의 긴장감의 정체다.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척 고민을 얼버무리고 있음을. 산적한 문제를 서울로부터 도피하며 애써 미뤄왔을 뿐임을 자각한다. 혜원도. 나도.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늦가을 태풍이 몰아친다. 가을 태풍으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언제 다하고 자빠졌냐.”라는 투정에 고모 복순은 차근차근하면 다 해결되게 되어있다며 “입 놀릴 시간에 몸 놀리면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있다.”라고 다독인다. 대자연은 이렇듯 묵묵하게 답을 준다.
엄마에게는 자연과 요리, 혜원에 대한 사랑이 그녀만의 작은 숲이었듯. 혜원도 자신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엄마의 요리를 따라 하고 엄마를 따라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어느덧 다시 깊어진 겨울을 따라 서울로 간다. 이런 그녀를 보고 은숙은 통장에 스쳐 지나가는 월급 같은 존재라며 투덜대지만, 재하는 혜원이 곧 돌아올 것이라 예견한다. ‘아주심기’를 준비하는 과정 같다며.
“양파는 모종 심기에서 시작된다. 가을에 씨를 뿌려 두었다가 발로 잘 밟고 건조와 비를 피해 멍석을 열흘 정도 잘 덮어두었다가 싹이 나면 걷는다. 싹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잘 키워서 미리 거름을 준 밭에 옮겨 심는데 이것이 아주심기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다.” (혜원)
“아주심기를 하고 난 다음에 뿌리가 자랄 때까지 보살펴주면 겨울의 서릿발에 뿌리가 들떠 말라죽을 일도 없을뿐더러 겨울에 심은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단단하다.” (재하)
혜원은 재하의 예견대로 아주 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밝은 분위기와 열린 결말에도 낙관하지 못하겠다. 수험생활 중에 이입해서 봐서 그런지 엔딩 크레디트 이후 혜원은 엄마를 마주하고 용기를 얻어 다시 임용고시를 도전할 것만 같다. 잠깐 서울에 상경해서 요리가 아닌 식빵에 잼을 발라 먹는 장면에서 고향에 다녀가기 전처럼 여유가 없어 보이지 않았다. 확실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내 특기니까.
<리틀 포레스트>는 시험 대비로 경직되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주는 영화였다. 혜원이 감자를 심을 때 나는 감자가 되었고, 내 머리카락은 감자 싹이 되었다.
“감자 싹이 나오면 다른 작물을 심을 준비를 해도 된다는 뜻이다.” (혜원)
나는 다른 작물 대신 미련과 후회를 고향 땅에 묻어놓고 찾지 않으련다. 회식이 싫었던 회사 생활도. 도망치듯 내려와 잃어버린 인간관계도. 비록 시골 사람도 아니고 도시 사람은 더욱 아닌 존재가 되었지만, 회식 자리에서 탬버린으로 부장의 뚝배기를 깬 은숙처럼. 근심과 걱정 없이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