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둘둘 로맨스
522번 버스는 늘 만원인 채로 내가 탈 정류장에 멈춰 섰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타야 했다.
버스 앞문이 열리면 무조건 올라 서서, 입구까지 꽉 들어찬 사람들을 향해 내 힘 반, 내 뒤 승객 힘 반이 가해지고, 이어서 기사님의 급출발이 부른 관성의 법칙이 동원되면, 밀려들어 간 나는 손잡이 하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정류장에서 만난 그 애는 항상 나보다 먼저 와있었다. 버스가 오면 그 애와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그 애는 돈암동에 있는 S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갈색 교복이 애늙은이 같아 보여 더 눈에 띄었다. 교복 자율화 이후 몇 년이 흘렀고, 다시 교복 착용 부활로 드물게 교복을 입는 학교들이 생기고 있었다.
그 애도 나를 봤다. 매일.
버스 안에서 그 애와 나는 어떤 때는 나란히, 어떤 때는 앞뒤로, 그러나 대부분이 뚝 떨어져서(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오히려 의문이다.) 30분가량을 함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고에서처럼 '저 이번에 내려요.'라든지, 내 뒤를 따라오는 청춘극장은 없었다. 호감보다 호기심이었고, 나를 더 비약하고 싶지 않지만, 그 애에게 나는 호기심도 없는 듯했다. 그나마도 2학년 때는 그 애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 애가 이사를 했거나, 그 애가 다니는 학교가 이사를 했거나.
로맨스는 없었지만, 워맨스는 있었다.
나의 버스 로맨스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전적으로 여기에 있다.
멀미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드디어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학 전 겨울방학 때 자격증을 따보겠다고 등록한 학원에서 만난 여자애들을 버스에서 또 만났다. 한동안은 멀미 때문에, 그리고 한동안은 낯가림이 선뜻 아는 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세 명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그렇게 멋쩍게 한두주 오며가며 얼굴이 익었을때, 버스에서 그중 한 명이 나한테 말을 걸었다.
“우리 학원에서 봤지? 너 버스 타는 거 많이 봤어. 우리 동갑 맞지?”
학원에서는 이미 같은 학년이라는 걸 알고 있던 터였다.
“응, 같은 수업 듣잖아. 알아.”
“너 버스 앞쪽에 앉아서 창밖만 보더라.”
“내가 멀미가 심해서, 차 앞쪽에 있어야 멀미가 덜 한다고 해서. 어디 살아?”
“홍은동”
“나는 세검정인데, 나보다 더 가는구나.”
“내일 버스에서 또 보자.”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말 걸어 준 그 친구 덕에 함께 있던 두 명과도 친해졌다.
그렇게 넷은 학원 동창으로 시작해, 같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같은 반이 된 적 없지만, 등하굣길 왕복 2시간을 3년동안 오둘둘 버스에서 한 반이 됐다.
등굣길, 나보다 네댓 정류장 앞서 탄 친구들은 버스 뒤쪽 어딘가 분명히 타고 있다. 가끔 그 친구들도 승객들 틈에서 겨우 서서 이리저리 휘청이다 정릉쯤에서 승객들이 대거 하차하면 비로소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다 빈자리를 차지한 친구가 있으면 그곳에 모였다. 앉은 친구가 누가 됐던 가방 무게를 버텨야 했다. 우리 편을 먹은 네 명은 인원수만큼 버스를 장악했다. 모이면 힘이 생긴다. 그 애도 정릉 어디쯤 내리는 승객들과 함께 쓸려갔다. 나만의 오둘둘 오작교는 작동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522번 버스를 '오둘둘'이라고 했다. 친구 한 명의 아버지가 오둘둘 기사님이었다. 아주 가끔 하굣길에 아버님 버스를 타게 되면 전세버스처럼, 친구 집처럼 편안했다. 게다가 차비를 받지 않으시니 회수권을 아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오둘둘 버스는 특이한 에피소드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북악터널을 지날 때 이야기다. 국민대학교 앞에서 평창동을 이어주는 터널은 산을 오르듯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터널 안 도로가 평평하지 않아서인지 배기가스가 환기가 잘 안되고 중간 어디쯤 고여있었다. 경유차가 내뿜는 지독한 매연이 차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 나와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버스 환기구를 닫는 데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달리는 버스에서 우리는 각자 흩어져 천장에 달려있는 환기구 손잡이를 잡기 위해 점프를 했다. 달리는 버스에서 제자리 뛰는건 놀이 같았다. 디스코팡팡 위에서 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환기구 손잡이를 잡은 다음에는 지체 없이 몸무게를 이용해 중력 방향으로 당겨 한 번에 닫아야 한다. 중력 방향에서 각도가 틀지거나 힘이 부족해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리게되면 우리는 매달린 친구 몸을 당겨 합심해서 닫았다.
또 하나는 북악터널 배기가스보다 무서운 최루가스 이야기다. 정릉을 지나 국민대 앞에 다다를 때면 학생 시위가 있는지가 큰 관심이었다. 1980년 5월과 1987년 6월의 분노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차로를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려고 했고, 전투경찰은 이를 막으려고 최루탄을 쏴댔다. 버스는 이들 가운데 멈춰 섰다. 이때도 우리들은 천장 환기구는 물론 모든 창문을 신속하게 닫았다. 아무리 닫아도 스며드는 최루가스는 눈물 콧물 범벅을 만들었다. 우리는 버스 안에 갇혀 집회의 끝을 기다렸다.
오둘둘 친구들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함께 했다. 여의도 공원에서 자전거를 처음 탔고, 다소 불량한 학생들이 주최하는 일일찻집에도 가보고,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도 봤다. 훗날 성인이 돼서 신촌에 있는 스페이스 락카페에, 그것도 4층에서 놀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오둘둘 친구들 덕분이다.
열일곱은 열여섯과 너무도 달랐다.
거의 다 자란 몸과 폭발하는 감성, 정리가 안되는 복잡한 생각, 서툰 표현과 어리숙한 해법으로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는 순수 열정의 영혼들이 열일곱이다. 세상을 별거 아니라고 어떻게든 가벼이 보고 싶은 객기, 객기로 가리고 싶은 두려움을 우리는 알았다. 그때 필요한 어깨가 바로 친구였다. 나는 너에게 너는 또 나에게.
퇴근길 라디오에서 김인순의 ‘여고졸업반’ 노래가 흐른다. 1975년에 나온 이 노래를 따라부르다 문득,
'이 여고졸업반 학생들은 많이 늙었겠다.'
나는 내 여고동창과 함께 들은 노래를 떠올렸다.
‘이제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이문세 ‘광화문 연가’, 이노래도 참 오래됐구나.
사진출처: 레쓰비 광고 캡,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