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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차려!

나도 고2가 되고 싶다.

by 달게

교실 앞문으로 2학년 선배들이 들어와 교단에 줄지어 섰다.

중학교 때는 경험하지 못한 위계가 느껴졌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기강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우리는 선생님보다 선배가 더 무서웠다. 실체를 모를수록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선배들 눈밖에 안 나려고 자리에 앉아 최대한 몸을 낮췄다.


특히 군기가 제일 세다는 엠알에이 선배들은 무표정하고 느릿한 말투로 동아리를 홍보했다. 나는 그 모습에 겁 먹었으면서도, 선배들이 멋있어 보였다. 모든 동아리가 방문해서 홍보한 것은 아니었다. 서예, 독서토론, 전산반, 방송반 등 대부분은 지면 공고로 모집하거나 공고 없이 소수만 아름아름 모집하기도 했다.


사실 나는 걸스카우트에 가입하고 싶었다. 걸스카우트는 어릴 적 로망 같은 단체다. 초등학교 때는 주로 잘 사는 친구들이 가입했다. 우리 집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에는 걸스카우트가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서도 가정형편은 그렇게 좋아지지 않았다. 학비와 학원비만으로도 충분히 엄마한테 부담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추가 경비가 없으면서 외향적인 활동을 하는 동아리가 좋았다. 그리고 센언니들의 집합소 엠알에이를 선택했다.


MRA(Moral Re-Armament)는 세계 연합단체다. 도덕을 재무장하자는 밝고 건전한 메세지를 SING OUT으로 전하는 활동을 한다.

내 선택만으로 가입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디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디션이 있던 날,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동아리방을 찾아갔다.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신입생이었다. 나도 빈자리에 서둘러 앉았다. 선배들은 주로 교실 가장자리 벽에 기대고 서있거나,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우리는 반과 이름을 써냈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호명을 받으면 교단에 올라가 가입 동기를 말하고 노래 한 곡을 불러야 했다.


나는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불렀다. 앞서 노래한 친구들에 비해 내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커서 선배들의 호감을 샀다. 선배들은 즉석에서 내게 간단한 율동을 가르치고 따라 하게 했다. 아마도 몸치인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배들 얼굴에서 흡족해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높은 점수로 합격을 점쳤지만, 그날 오디션을 본 신입생 모두가 MRA에 가입했다. 그래도 모집인원은 미달이었다.


MRA는 단복이 필요 없는 줄 알고 가입했지만, 나중에 SING OUT 대회에 출전하면서 엄마를 어쩔 수 없이 힘들게 했다.


매주 수요일 8교시에 모이는 MRA 동아리는 생각만큼 재미가 없었다. 층층시하 선배들 기세에 눌려 답답하고 불편했다. 봄이 다 지나갈 무렵부터는 3학년 선배들이 취업준비로 동아리에 나오지 않아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지만, 2학년 선배들은 그럴 틈을 주지않았다. 그들도 이때만 기다린 듯 도제식 연습을 핑계로 우리들을 괴롭혔다.


도덕 재무장은 다른말로 군기 재무장을 뜻하는지, 누군가 지각했고, 누군가 결석했고, 또 인사를 제대로 안 했다는 이유로 엎드려뻗쳐나 운동장 오래달리기 같은 단체 얼차려를 시시때때로 받았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지역 고등학교 SING OUT 대회 출전 연습은 또 하나의 얼차려였다.


'인간 마음속에 양심이 있다네!

양심대로 산다면 얼마나 즐거워

마음속이 즐거우면 만사가 즐거워

이런 마음 가지면 안 될 일이 없어요.

모두 일어나 다 같이 손을 잡고

모두 일어나 다 함께 전진하세

노래를 하며 서로서로를 위해준다면

우리의 마음속 고통은 사라지고 웃음의 꽃이 피리'


크게 더 크게! 혼나며 배운 단가, 35년이 흐른 지금도 틀리지 않고 노래와 율동을 할 수 있다. 교가는 못 외우면서 단가는 확실이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얼차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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