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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과

1988년 3월

by 달게

나는 정보처리과 7반에 배정됐다. 정보처리 관련 학과가 급증가하던 시절, 상업고등학교에도 서너 해 전부터 이를 교육과정에 반영했다. 우리 학교는 상업과와 정보처리과 두 개 과를 두었다. 줄여서 상과와 정보과로 불렀는데, 상과는 4개 반, 정보과는 3개 반이었다. 밝혀진 바는 없지만, 상과에 먼저 성적 우수생을 배정한 것에 대한 질투에 정보과는 똑똑한 학생이 배정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뭐 큰일일까 싶지만, 그땐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역시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소문은 정보과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나는 겨울방학 내내 고등학생을 준비하며 키워온 포부만큼 학교에 기대도 컸다. 그동안과 다른 각오와 비장함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함께 입학한 7개 반 450명에 가까운 동기들 모두가 의욕 과잉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두가 처음인 교실에서 처음 보는 친구들이지만, 통성명이 넘나들고, 활기가 넘쳐났다. 누구 하나 주뼛대지 않았던 것 같다. 한껏 고양된 분위기에 나 또한 낯가림 뒤에 숨어있던 의욕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정보과는 상과에 비해 컴퓨터 관련 과목이 더 있다. 2024년 AI를 정면으로 마주할 줄 알았다면 정보처리과를 그렇게 띄엄띄엄 대하지 않았을 텐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처럼 과거로 돌아가 컴퓨터 공부에 매진했다면, 지금 구글 같은 회사에서 임원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즐거운 상상은 여기까지, 정보처리과는 생소하고 인기도 낮았다. 게다가 나에겐 어려운 과목이었다. 포트란이 어떻고 코볼이 어떻고... 아쉬움이 많지만, 지금은 프로그램 이용자로도 충분히 감사하며 살고있다.


의욕 넘치는 어리바리한 신입생은 학교를 익히느라 분주했다. 과목별 선생님을 맞이하고, 반장과 부반장, 임원을 뽑고, 서로 맞는 친구를 찾아 나섰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있는 정보과와 상과는 쉬는 시간이면 서로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신입생들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학교는 얼어붙은 겨울 같았다. 불과 넉 달 전에 있었던 농성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부서진 집기들이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발견됐다. 사학 비리에 맞선 선배들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미처 처리하지 못한 부서진 책상과 그 위에 함께 쌓여있는 절절한 소리 중 한두 글자가 얼어붙은 학교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은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 학생회가 꾸려지고 나서 그들을 통해 전해 들은 뒤숭숭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떠다녔다. 학교 측은 신입생을 받기 위해 부랴부랴 덮고 싶었겠지만, 없었던 일로 될 수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서슬 퍼런 5공화국 정권 폭압의 실체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35년 전 선배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월간 말’지의 기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보존하고 있는 학원 정상화 수습대책 회의의 입장문 원문을 찾았다. 교내 농성의 실체는 매우 처참했다. 재단은 학생들의 KBS 방송 출연료와 수재의연금을 착복했고, 야간 학생들에게 금품을 요구하고, 교사 월급을 줄이려고 강사를 채용하면서 의료보험과 보너스 혜택을 고의로 지급하지 않았다. 재단은 착복한 돈으로 건물과 과수원 등 개인 재산 불리기에 급급했다. 사학 비리를 바로잡으려는 학생들의 농성에 학교 측은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신체 폭력도 서슴지 않았으며, 경찰력을 동원해 농성을 진압하며 구타를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함께한 학생, 교사, 학부모가 크게 다치고, 구속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와 비슷한 사학비리와 교내 민주교육 쟁취를 외치는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가 ‘군부독재 타도하자!’, ‘백만학도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촛불 평화 행진을 벌였다고 쓰여있다.


1988년 3월은 추웠다. 학교 운동장은 아직 땅이 얼어 마른 먼지만 날렸다. 간간이 눈발도 날렸다.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를 못 참는 친구들의 과장된 친밀감 덕에 그나마 교실은 따뜻했다.


1987. 11. 25. 철야농성 22일째 서명교사들의 입장문을 옮겨본다.

하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재단은 즉각 퇴진하라.

하나, 000 교육감은 책임지고 물러나고, 재단을 비호하는 시교위는 각성하라.

하나, 학생과 학부모를 짓밟은 폭력경찰, 000 경찰서장을 파면하라.

하나, 경찰 폭력에 가담한 교감 및 그에 협력한 비양심 교사는 총 퇴진하라.

하나, 학생회의 자치성을 조속히 보장하라.

하나, 교사의 자율화를 최대한 보장하라.


2024년은 다른 시대라고 생각하며 평온, 공연하게 살아온 나의 삶을 일순간 무너뜨린 현재 대통령에게 위 입장문을 대신하여 경고한다. 1988년 3월 봄을 기다렸듯, 나는 지금 이른 봄을 기다린다.

월간 말, 198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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