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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셔봤다

1988년 2월

by 달게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날은 작은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기도 했다. 내가 다니는 여중과 언니가 다니는 여고는 산꼭대기에 아래, 위로 있었다. 대학교 부속학교라서 사실상 대학교와 여고, 여중의 경계가 특별히 없었다. 쉬는 시간에 가끔 언니가 체육복을 빌리러 우리 반을 찾아오기도 했었으니, 거리도 가깝고 오고 가는데 거리낄 게 없었다. 졸업식은 고등학교가 먼저 그리고 중학교가 이어서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언니를 따라 고등학교로 우르르 갔다가 다시 다 같이 나의 졸업식을 보려고 또 우르르 이동했다. 언니는 졸업장 외에 성적우수상, 모범상, 개근상까지 받아 가족의 일원으로 언니가 참 자랑스러웠는데, 나는 그 흔한 개근상도 받지 못했다. 한해 이틀씩은 심하게 아파 결석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을 하나도 못 받았지만, 졸업장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축제 같은 졸업식이었다. 고등학교에 걱정 없이 합격했겠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취업도 하겠다, 내게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얼마나 매서운 곳인지 알 길이 없는 나이였다.


시청각으로 진행된 졸업식이 모두 끝나고, 반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진을 남기느라 바빴다. 혼날 일이 있지 않고는 절대 가지 않는 교무실에도 서슴없이 찾아가 선생님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어서 다니다 보면 다리가 굵어진다고 하여 붙은 별명 '무다리 공장' 이제 안녕!


그 후로 딱 한 번 학교를 찾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다니는 상업고등학교를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가끔 그때 선생님들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짝꿍이었던 그 친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모교에 대한 애착이 약하다.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본 적 없이 평범하면서 어중간한 위치(실제 성적도 중간, 키도 중간, 반번호도 중간이었다.)에서, 몇몇 친구들하고만 친밀하게 지냈더랬다. 학교를 떠난 지 수 십년이 지났는데도, 교가를 기억한다거나, 또 선생님과 반 친구들의 근황을 알고 있는 친구를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이겠지 싶어 그런 추억 하나 없는 나로서는 부러울 때도 있다.


엄마는 졸업식 날만큼이나 특별한 점심을 레스토랑에서 사주셨다. 레스토랑은 학교에 오르는 삼거리 초입에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먹은 분식점 겸 경양식집의 돈가스에 비하면 레스토랑은 정말 특별히 특별한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작은언니가 받은 상장 덕일 수도 있는데, 이유야 뭐가 됐건 레스토랑에 갔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이벤트였다. 엄마는 돈가스 정식을 시켜주셨다. 수프부터 나오고, 빵과 밥을 선택할 수 있는 정식 말이다. 서빙을 보는 사람이 주문을 받으며 졸업식이라고 하니 빵과 밥을 모두 주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포크와 나이프, 무릎을 덮을 냅킨, 그리고 컴컴한 레스토랑 실내에 이마까지 내려온 조명에 비친 엄마의 미소가 환하게 반사돼 많이 먹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얀 접시를 꽉 채운 커다란 돈가스를 칼로 조금씩 썰어가며 먹었다. 돈가스가 점점 줄어드는 아쉬움까지 함께 먹었다.


졸업식날이라 허용되는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친구 집에서의 졸업 파티였다. 졸업 파티하면 미국 드라마 '베버리힐스의 아이들'에서나 봄 직한 댄스파티 정도를 상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었다. 그저 나를 포함한 세명의 친구가 그중 한 명의 집에 모여 밤새고 놀자는 계획이었다. 단칸방에서 가족 모두 같이 살다가 세 자매의 방이 생긴 지 불과 몇 년 안 된 나로서는 혼자만의 방을 갖고 있는 친구의 집에서 밤을 새우며 노는 것은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끼리 놀 수 있다는 것은 이전에 나한테는 없던 경험이었다.


친구는 커다란 거실과 주방, 공간을 짐작할 수 없는 문들이 많은 저택에 살고 있었다. 걸음마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넓은 집으로 이사했더니 '내 아이가 그렇게 잘 뛰는지 몰랐다.'는 우스갯말을 하듯이, 바로 내가 그 걸음마 아이가 된 것처럼 친구의 넓은 집을 만끽하고 다녔다. 우리는 딱히 무엇을 하며 밤을 새울지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소회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다짐 혹은 꿈, 그런 건 애초에 없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고민이나 걱정은 졸업식 날만큼은 하지 말자! 그저 노래하고 떠들며 놀자! 이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팝스타 음악을 실컷 듣자는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는 감미로운 추억의 가요로 가득했지만, 1980년대는 팝송이 대세였다.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그때는 주로 영국에 있었다. 나열하자면 많지만 그 대표가 DURAN DURAN과 WHAM이었다. 나는 왬의 조지 마이클의 아내였고, 친구는 듀란듀란의 사이먼 르본의 아내였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다 같이 떼창을 하다가 몸서리치게 좋아서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밤새 쾅쾅 울렸더랬다.


사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기다려지면서도 두려웠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대부분이 고등학교로 진학하니까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또 달랐다. 내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라는 타이틀 ‘이제 넌 더이상 어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아 설레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다가오는 부담을 잠깐이지만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우리는 샴페인을 선택했다. 아주 원시적이지만 기발한 방법이었다.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십 대의 어처구니없는 반항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술이라는 일탈을 경험함으로써 멀리 있는 이별, 진학, 또 다른 세상을 맞을 두려움을 잠시 잊어 보려 했다.


제과점에 가면 저 높은 선반 어딘가에 한 병 정도는 꼭 진열된 샴페인, 파는 것인지, 과연 팔릴지 궁금했던 그 샴페인을 우리가 샀다.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그 샴페인을 몰래 사 들고 와 셋은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주제도 없고 맥락도 없는 말들을 하며,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졸업식 날은 듀란듀란과 왬도 우리를 축하해 주었다. 그날 친구 집에 들고 갔던 조지 마이클의 페이스 레코드판은 졸업장처럼 간직하고 있다.


듀란듀란을 좋아했던 그 친구와는 이후 만나지 못했다. 갈림길은 여기서부터였다. 언제까지나 다 함께 같은 길을 갈 것 같았지만, 열일곱 살에 진짜 세상에 던져질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2016년 12월 25일 조지 마이클도 그렇게 떠날 줄 몰랐다.

스크린샷 2024-12-20 143359.png Faith _ George Michael LP재킷

사진출처: 영화 '써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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