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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겨울

1988년 1월

by 달게

나는 상업고등학교 정보처리과에 합격했다.

연합고사까지 마친 중3 교실은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모두 그 결정에 순응하는 듯했다. 2월에 있을 졸업식만 참석하면 중학교는 안녕이다.

1988년 새해를 맞은 나는 새 희망을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진학 예정인 고등학교 부근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려고 버스에 올랐다. 미리 자격증을 따놓으면 학업에 수월하다고 홍보 때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기때문이다. 뛸 듯, 날 듯했던 합격의 기쁨으로 붕떠 있는 나를 이제 가라앉혀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내 앞에 펼쳐진 비포장 길에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집은 종로구 홍지동에 있고 학교는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어, 522번 버스를 타면 4, 50분 걸리는 거리였다. 학원은 학교에서 십여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산과 부기과목인데, 주산은 주판을 이용해 다양한 계산법을 익히는 과목이고, 부기는 기업의 회계와 재무제표를 다루는 과목이다. 주산이 원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계산의 원리를 익히는데 기본이 되고, 검산할 경우 주산만큼 정확한 것이 없었다. 지금의 엑셀 프로그램이 보편화되기 전의 이야기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 학원비를 아끼지 않고 지원해 주셨다. 엄밀히 말하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했던 큰오빠가 번 돈으로 학원비를 냈다. 새삼 오빠가 고맙다.


문제는 버스였다.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걸어서 등하교했었다. 어쩌다 버스를 타더라도 광화문 이상을 다녀 본 적이 없는, 엄마 말을 빌자면 서울 촌년이었다. 방학 때 강원도 거진에 있는 외가에 간다고 하면 멀미로 인한 맘고생, 몸고생을 각오하고 버스에 올라야 했었다. 낯선 학원에서 부기라는 낯선 과목을 배우는 부담은 둘째 치고, 낯선 버스에서 긴 시간을 시달려야 하는 것이 나에겐 또 다른 시험대였다. 너무 쉽게 합격증을 줬다고 조물주든 누구든 생각한 것일까? 멀미는 호기롭게 세운 새해 계획을 무참하게 만들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학원 공부가 모두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여지없이 어지럽고 메스꺼움이 몰려와 가까스로 버텨 집에 도착했다. 홍보 왔던 그 선배들이 야속했고, 아니 그 무엇보다 집 앞에 고등학교를 놔두고 구태여 멀리 다니기로 한 나의 결정이 후회됐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집에 일찍 도착하기를 바라며 내다본 차창 밖에는 건너편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줄지어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차들의 바퀴의 반은 시커먼 눈에 묻혀 바퀴가 구를 때마다 역시 시커먼 눈덩이를 푸타타타 여기저기 튀기며 움직인다. 인도의 하얀 빙판을 엉금거리며 걷은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인다. 나는 멀미로 괴로운데, 저들은 행복해 보인다. 내가 탄 버스도 눈길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나를 자꾸 앞으로, 뒤로 흔들어댄다. 창문은 꽁꽁 얼어붙어 꿈쩍하지도 않는다. 정류장마다 멈춰 선 버스는 출입구를 열어 찬 공기와 배기가스를 사람들과 함께 태운다. 고작 차멀미인데, 차멀미를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도 보호자가 없는 홀로서기의 첫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 번째 돌부리에 나는 넘어져 간신히 붙잡고 일어날수 있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엘튼 존이다. 엘튼 존의 노래 ‘Your Song’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십 대를 함께 해주었다. 휴대용 카세트로 듣던 엘튼 존 테이프를 앞뒤로 다 듣고, 다시 'Your Song'이 들릴 때쯤이면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눈도 많고,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버스에 앉아 있는 내가 기억난다.


나는 엘튼 존의 응원으로 한 달 가까운 훈련을 마치고 멀미를 이겨냈다. 멀미를 이겨내고나서는 버스 이동시간이 기대의 시간이 되었다. 한달을 끙끙앓던 내 몸도 원기를 회복했다. 창피하지만 울다가 웃었다. 입학이 기다려 진다.


비포장 길 같았던 험난한 여정도, 지나서 돌아보면 고속도로처럼 말끔해 보이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높은 산을 넘은 경험을 한다. 그리고 오늘 다시 그의 노래 'Your Song'을 듣는다. 지금 내 앞에는 넘어야 할 큰 산이 있고, 지나가야 할 비포장 길이 있다. 2024년 12월 14일 오후 4시가 지나서 '그저 돌부리였구나!, 고속도로를 지났구나!' 하며 이야기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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