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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유혹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던 그때, 나는

by 달게

중학교 3학년이었다. 신문 지면에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88 올림픽 준비를 다룬 기사가 연일 함께 실렸다. 잘은 몰랐지만, 조간신문을 소리 내서 읽는 엄마 때문에 귀동냥으로 대충은 알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청와대와는 불과 3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보니 군부대 검문소가 있었다. 자정이 되면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군인들이 차량의 진입을 검문했다.


대한민국의 엄중한 시국만큼은 아니어도, 내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나만이 아니고, 당시 고입을 앞둔 2차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약 90만 명에 가까운 동갑들에게 놓인 현실이었다. 겨우 16년을 살아놓고 인생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어불성설 같지만, 요즘 유치원 때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한다는 세태를 보면 열여섯 살이 많이 늦어 보이기까지 한다. 어쨌거나 그땐 그랬다.


중2 겨울방학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중3 성적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진로의 향방이 갈리는데, 나는 수학 문제집 한 권을 풀지 않았고, 맨투맨 영어 문법책 한 장을 들춰보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에 엽서를 그려 방송국에 보내고, 내 사연이 혹시라도 방송을 탈까 싶어 라디오 곁을 떠나지 못했다.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1남 3녀 중 막내인 내게 주어진 혜택이었거나 무관심 중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덕에 늘 벼락치기로 시험공부했고, 운 좋게도 공들인 시간에 비해 좋은 성적을 몇 번 거두고는 습관이 돼버렸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수법은 잘 통하지 않았다.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3학년 1학기를 배회하며 보내고 있을 때, 학교 홍보 목적으로 방문한 상업고등학교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선배들은 국내 굴지의 금융회사를 거론하며 취업률을 자랑했고, 상업고등학교 특유의 교과목도 설명했다. 그중에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말은 다름 아닌 교내 동아리 활동이었다. 다양한 동아리가 있고, 선후배들이 친밀하게 활동한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당연히 진학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가정 형편도 고려해야 했고, 학업성적은 더욱 고려해야 했던 문제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터에 동아리 활동은 내 선택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족들은 상고로 진학하겠다는 내게 대학 안 가도 괜찮은지, 후회하지 않겠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막연하게 자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있을 마지막 모의고사와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고, 연합고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잘한 선택이라도 믿었다. 나는 이렇게 일차원적인 사고로 선배의 유혹에 완벽하게 넘어갔다.


동아리 활동을 강조하던 그 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특출나게 잘하는 것 없던 내가 뭔가 해냈고,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이제 겨우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뿐인데, 벌써 취직이라도 한 것처럼 창창한 앞날이 고속도로처럼 활짝 열려있는 것 같았다. 반 친구들은 연합고사를 보지 않아도 되는 나를 부러워했다. 나는 친구들보다 한 발짝 먼저 앞서가는 것 같아 우쭐하기도 했다. 고속도로에 닿기까지는 비포장 길이 있다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나는 중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스크린샷 2024-12-03 151135.png 영화 '써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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