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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유 Nov 22. 2020

여자나이 오십

2막 그렇지만 # 발톱이 자라는 사이

대학생이던 나는 오십이 넘은 울 엄마가 매일 아침이면 밥상을 차리다 말고 후다닥 뛰어 들어가던

화장실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급하면 좀 미리미리 신호가 올때 가실 일이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하! 그런데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 놈의 신호는 결코 미리미리 와주는 법이 없다.

갑작스럽게 예고없이 생각못한 장소와 시간에서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민성 대장증세에 참을수 없는 요실금 증세까지 50이 훌쩍 넘은 울 엄마를 괴롭혔을 

그 혐오덩어리 노화증세들. 나이는 기꺼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듯 아침이면 가끔씩 허둥지둥 화장실을 

찾을때마다 지울 수 없는 옛날 그 장면을 마주한것처럼 미안하고 계면쩍어진다. 

그런 날이면 팔순이 훌쩍 넘은 노모에게 괜하게 달짝지근한 전화를 건다.

전화를 끊고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괜한 감상에 젖은 일요일 오전. 물끄러미 발톱에 눈이 간다.  


지난 여름, 하이힐의 샌들을 신고 다니느라 발랐던 빨간색 패티큐어의 자욱이 

흔적만 남은 초승달 처럼 발톱의 맨 위 끄트머리에 보일듯 말듯 살아 있다.

"어머나. 그새 이렇게 자라서 올라간거야?"

발톱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말고 세월 흐름에 감탄이 쏟아진다.

손으로 칠한 액체 패티큐어를 제대로 지울 새도 없이 그 위에 스티커 패티큐어를 모양내 발라두다 보니

안에 숨은 액체 패티큐어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지 않은채로 연하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었구나.

위로 밀려나간 패티큐어의 흔적을 보니, 내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이 와락 달려든다.

생각못한 사이,  나의 정맥과 동맥을 따라 피가 흐르고 심장을 중심으로 헤쳐모여를 반복하면서

손끝과 발끝까지 쉼없이 움직이며 나를 살리고 있었을 내 몸의 모든 장기들. 

그리하여 손톱이 자라고 발톱이 자라고 나는 살아있다. 

언제 이렇게 자란 것일까? 보이지 않는 1미리의 1미리. 그 1미리의 1미리의 또 1미리. 셀 수 없는 단위로 

쪼개고 쪼개진 작은 표면만큼 발톱은 숨을 쉬며 세상 밖으로 기재개를 켜고 있었구나. 


보이는 화려한 것들에게는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까칠해진 머리카락을 자르고 파마하고 공들여 컬을 만들고 염색을 하고 영양제를 투여하면서, 손톱에는 바르고 칠하고를 뗐다 붙였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얼굴에는 좋다는 온갖 것들을 바르고 쏟아부으면서 그렇게 내가 나임을 과시하며 

보이는 것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성을 들이며 살아갈 때 

무던히 자신의 할일을 하며 존재를 지키고 있었을 발톱에게는 정말 발톱의 때만큼이나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쳐왔다. 그래도 군말없이 자라준 나의 발톱. 보이지않는 숨은 존재감이 더 고마워진다.


젊을때는 속도가 빨라 한치 앞도 미리 볼 수가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도 다 뛸수가 없어 늘 허덕였다.

다 왔나 싶으면 더 멀리 간 그들 때문에 마음은 항상 초조했다. 남들만큼은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절대로 뒤돌아보지 못하게 나를 조여왔다. 사는게 투쟁인줄 알았던 나에게 어느날 중년의 딱지가 찾아왔고

장년의 세계가 훅 들이쳤다. 이제는  빛의 속도로 달릴 수도 없다. 아니, 달릴 이유도 없다.

그리하여 느긋하게 돌아보며 여유있게 살 수 있다 싶었건만

많이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이 다시 긴장을 주고,  물러서라 등떠미는 세상의 변화들이 소소한 존재감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아. 보려므나! 

발톱 자라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는 살아있다. 현란하게 보이는 존재가 아니어도 

발톱의 때를 싹싹 닦아내며 소리없는 발톱의 아우성에 귀도 기울일 수 있는 깊은 여유로 나는 살아있다.

발톱아 고맙다. 

소리없이 살아가고 있는 네가 이렇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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