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러 오세요

회사 어른들의 소꿉놀이와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

by 송송

중요한 일은 오전에 집중적으로 해치우는 편인 나는 출근 후 바로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날에 예정한 만큼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다. 그래서 출근하면 가방을 의자 던져놓고 바로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펼친다(아, 물론 손은 씻고 와서).


출근 직후 일에 집중하는 것은 업무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수년간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든 나만의 루틴이다. 때문에 누군가 아침시간에 나를 방해하면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다행히 우리 회사에는 나와 같이 오전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서로 방해하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새로운 부장이 오면서 나의 이런 루틴이 깨져버렸다. 부장은 8시 40분만 되면 자기 방으로 차를 마시러 오라고 한다. 부장 방에서 차를 마시고 나오면 최소 9시 20분, 나의 아침 루틴이 다 망가졌고 나는 종일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일이 밀려 집에 가져오는 일도 꽤 있다. 내가 겨우 찾은 내 루틴인데..... 으.... 화가 난다. 부장이 갈 때까지 내 업무 루틴을 다시 짜야하는가?


매일 세종시에서 출근하는 부장은 매일 1시간 반 가까운 긴 여행에 지쳐,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혼자 마시는 무료함을 달래러 부장은 차 친구를 찾았고, 요즘 내가 주로 차 친구 역할을 한다. “차 마시러 오세요~”라는 말이 들리면 나는 리모컨으로 조종당하는 로봇처럼 부장 방에 질질 끌려간다. 회사에서 직급이란 최고의 권력이라 거부할 수 없다.


차 마시고 나오는 나를 볼 때마다 나의 팀장은 ‘가여워라’하는 눈으로 측은하게 쳐다본다.


“팀장님도 차 좀 마셔보면 어떠세요? 좋은 차를 일부러 내어 주시는 것 같던데요”

“난 됐네요. 커피가 좋아요. 차 안 좋아해요.”


하긴, 이렇게 마시면 좋아하던 차도 싫어질 것 같다.


처음부터 내가 차 친구였던 것은 아니다. 후배 A가 부장이 온 이후로 쭉 부장 전담 차 친구를 하고 있는데, A 혼자 매일 부장을 만나는 것이 싫어서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나는 후배 A를 매우 아끼고 후배 A도 나를 매우 좋아하기에, A가 같이 부장 방에서 차를 마시자 할 때 거절할 수 없었다.


차에 조예가 깊은 부장은 육보차, 히말라야 야생 국화차, 보이차, 우롱차, 뽕잎차 등 내가 죽을 때까지 마셔볼 일 없고, 내 돈 내고 절대 마실 일이 없을 다양한 종류의 비싼 차를 제공한다. 차 맛은 정말 좋다. 집에서 마셔보고 싶고 다기에 관심이 생길 만큼 맛나다. 그래도 부장의 “차 마시러 오세요~”라는 말은 달갑지 않다.


매일 8시 40분부터 9시 20분까지, 부장과 차를 마신다고 생각해봐라.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부장님, 이쪽 벽에 걸린 그림이 좋네요. 난도 치시나 봐요, 지난번 보여주신 붓글씨도 멋지던데 난까지 치시다니 대단해요. 중국어도 잘하신다면서요? 매일 등산하신다고요? 끈기가 대단하시네요. 관리를 잘하셔서 그런지 배도 안 나오셨어요. 네네.. 하하. 호호. 용비어천가도 하루 이틀이지 12월부터 시작된 매일의 차 친구 노릇이 두 달 가까이 되니 이젠 못 해 먹겠다. 재택근무 날이 기다려지고, 최대한 천천히 걸어서 사무실에 들어가고, 9시 넘어서까지 내 사무실에 불을 켜지 않기도 한다.


아침 회의를 준비해야 한다거나 팀장이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 차를 마시지 않은 날이 있으면 그다음 날에 부장은 꼭 “어제는 왜 안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는데.”라고 한다. 오전에 못 마신 날에는 “점심 먹고 오후에 차 마시러 오세요~”라고 한다. 진한 부산 사투리의 “차 마시러 오세요~”라는 한마디가 나와 A의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든다.


이렇게는 더 못하겠다 싶어서 나와 A는 꾀를 내어 2주 전에 옆 팀으로 발령받은 새 직원을 부장의 차 친구로 영입하였다. 우리 부서에 자원해서 온 사람이라 지금은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이 넘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부장의 차 친구 역할도 매우 충실하게 하고 있다. 덕분에 나와 A는 한숨을 돌렸다.


어제부터 카페 취식이 가능해졌다(이 글을 쓴 시기는 2021년 1월 19일, 그때는 카페 취식 금지였다). 나와 A는 쾌재를 불렀다. 우리는 내일 아침부터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최대한 뭉개다가 8시 59분에 사무실에 들어오기로 했다. 부장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소심한 복수를 할 수 있어 약간의 통쾌함을 느낀다.


“차 마시러 오세요~”


분명 좋은 말인데, 점점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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