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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un 04. 2022

조금만 각도를 틀어보아요

지난 목요일에는 늘 다니던 삼청동 점심 산책길을 종로 쪽으로 틀었다.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창의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아, 그날 한번 실천해보기로 했다. 점심은 쌀국수로 후루룩 때우고 종로 2가에서 을지로 쪽으로 길게 걷기로 마음먹었다.


간판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어슬렁거리다가, 얼마 전 동네 그리스 식당 주인이 인**그램에 올렸던 그리스 복식에 대한 전시회를 소개 글이 떠올랐다. 전시회가 을지로 근처의 한 빌딩에서 열린다고 얼핏 본 것 같아 확인해보니 바로 저 앞에 있는 빌딩이 그곳이었다. 산책을 멈추고 바로 건물로 들어갔다.


전시회명은 <영혼을 수놓은 초상, 그리스 의복>(한국교류재단 주최, (https://www.kf.or.kr/kf/na/ntt/selectNttInfo.do?mi=1131&bbsId=1051&nttSn=109751), 그리스 혁명(1821년)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년에 그리스 국립역사박물관이 기획한 프로젝트에서 비롯된 전시이다. 작품들은 그리스 의복을 입은 초상 사진을 캔버스에 인화하여 의복의 일부분을 자수로 장식한 것들이었다.


캔버스 위의 의복은 매우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금과 은으로 된 스팽글과 구슬, 견사, 면사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직접 수를 놓았는데, 작품을 비추는 조명을 수를 놓은 실이 강조되도록 배치하여 18-19세기의 그리스 왕과 장군, 귀족들이 입던 옷의 화려함을 더 해주었다. 또한 전시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그리스 음악이 잔잔히 깔리게 하였고 그리스를 상징하는 향수의 향을 전시장 곳곳에 배치하여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후각을 모두 동원하여 전시를 감상하도록 하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작품을 감상하고 전시장 가운데 서 있는 나의 오른쪽 벽에서 혁명을 지휘하던 부리부리한 눈의 장군이 튀어나올 것 같고, 정면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그리스 왕이 근엄하게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으며, 왼쪽 벽에서는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기도드리는 그리스 여인의 간절한 마음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의복, 몽환적인 음악, 그리고 처음 맡아보는 향이 어우러져 나는 전시를 감상하는 동안 200년 전 혁명 당시의 그리스에 잠시 다녀온 것 같았다.


왕, 귀족, 장군과 같은 신분이 높은 남자들은 주름이 200개나 잡혀있는 하얀색 치마를 바지 위에 덫 입는다는 사실(옷 이름을 검색했지만 못 찾음), 1821년에서 1829년까지 근대 그리스의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이를 그리스 혁명이라고 부른다는 점 등 내가 모르던 그리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흥미로왔다.


큐레이터에게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묻고 나오면서, 코로나가 진정되면 그리스를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시장 앞에 놓여있는 그리스 소개 책자와 관광안내서를 가득 챙겨 왔다.


새로운 곳을 걷겠다는 조금의 변화가 전시회 관람으로 문화적 소양도 쌓고 다른 나라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우연을 만나게 했다. 평소와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은 이런 묘미 때문에 설레고 쫄깃한 것 같다. 늘 하던 일, 늘 먹는 음식, 늘 가던 길에서 한 10도씩만 각도를 틀면 이렇게 새롭고 재밌는 것을 만날 수 있는, 10도를 꺾어 30도 40도로 변화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하겠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글을 볼 수도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동네 그리스인 남편을 두신 그리스 식당 사장님께 감사를 전한다. 맛난 음식과 친절한 설명으로 감동을 주시더니 이렇게 새로운 문물을 접할 기회를 알려주는 호의까지 베푸시다니, 다음에 가면 덕분에 풍요로워졌다고 꼭 말할 거다. 동네 가게를 자주 이용해야 하는 이유가 또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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