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송 May 28. 2022

시발 비용


이번 금요일은 딸과 놀려고 휴가를 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일 계획이었지만 뭘 잘못 먹었는지 목요일 밤에 속을 다 게워낸 상태라 계획은 무시하고 이불속에서 아이와 같이 10시 넘어서 까지 뒹굴거렸다. 대충 밥을 먹고(오! 밥이 또 들어가네? 나의 소화력은 놀랍다), 딸아이 안과 검진을 마친 후 근처 대형마트로 놀러 가기로 했다.    

 

집을 나서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 주인공은 어제 내가 검토해주었던 보고서의 작성자였고, 월요일에 자기 팀장과 만나자고 한다. 그 팀장은 내가 매우 싫어하는 경우 없는 학교 선배이다. 우리 팀의 토의견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봐 늘 그렇게 해왔듯이 후배인 나를 압박하려고 연락한 것이다. 월요일에 다시 얘기하자고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고 속도 메스꺼워졌다. 아, 짜증~ 마트 가서 뭐라도 질러야겠다.     


우선 딸이 좋아하는 치즈를 집어 들었다. 2개면 된다는 딸에게 내가 다 먹겠다고 하고 진열대에 있는 치즈 7개를 싹쓸이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잔뜩 담았다. 가격이 꽤 나왔다. 하지만 뭔가를 사니 불편한 전화를 받고 나빠졌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마트에 다녀온 후 딸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동네에 새로 생긴 와인가게의 핑크빛 네온 간판이 나를 유혹했다. 들어가면 안 되는 데라면서도 어느새 나는 와인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에 말에 조금 전의 망설임은 다 잊었다. 진열대에서 즐겨 마셨던 와인이 저렴한 가격에 나온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몇 병 집어 들었다. 계산대 옆에 있는 치즈도 아까 샀던 것보다 쌌다. 이것도 집어 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은 이 와인과 잘 어울릴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것을 먹으면 좋겠다 싶어 배달앱을 뒤져 주문을 했다. 저녁을 먹으며 아까 받은 짜증 나는 전화통화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돈은 이렇게 기분 안 좋을 때 쓰려고 버는 거지’라고 위로했다.     


토요일 아침, 이번 주 지출내역을 정리하다가 한숨이 나왔다. ‘아, 내가 또 시발 비용을 엄청 썼구나.’ 어제 하루에 쓴 비용이 지난주 식비에 버금갔다. 후회, 후회, 후회...     


돌이켜 보니, 나의 첫 시발 비용은 고3 때 초콜릿 구입에 쓴 것인 것 같다. 입시 스트레스를 종류별 초콜릿을 시도 때도 없이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해소했던 기억이 난다. 그 덕에 고3 졸업 무렵 몸무게가 60킬로 후반을 달렸었다. 


그다음은 직장생활 초년기에 귀걸이 사는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치솟는 날에는 회사가 있던 용인에서 신촌까지 달려와 귀걸이를 샀었다. 금속 알레르기가 생겨 18K 아니면 낄 수 없게 되기 전까지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귀걸이로 탕진하는 습관은 쉬 없어지지 않았다.   


귀걸이에서 시작된 나의 시발 비용의 사용처는 술과 옷으로 옮겨갔다. 종류를 가지리 않고 술을 퍼마시고(금토일에 주로), 같은 디자인의 옷을 깔 별로 사는 이상한 탕진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은 먹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시발 비용은 스트레스 완화에는 효과적인데 재산을 탕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매우 크다. 이점을 보완하고자 발상을 전환하여, 화날 때마다 시발 비용을 쓰는 대신 시발 적금 들어보자는 주장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을 때 시발 비용을 쓰는 대신 돈을 저축하는 것이라는데, 예를 들면 적금 주기를 월 18일, 금액 1,818원으로 설정해 놓거나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마다 18,000원을 자동 이체하는 것 등등이다(참고: 시발 비용 대신 시발 적금 들어요. “화나면 돈이 쌓인다?” 아시아투데이 2020.12.08. htt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201207001501519)


하루만 더 일찍 이 기사를 봤으면 시발 비용이 아니라 시발 적금을 들었을 텐데, 아! 안타깝다.    


             


[시발 비용 : 비속어인 ‘시발’과 ‘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이를 테면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고급 미용실에서 파머 하거나 평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던 길을 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지출하게 된 비용이 해당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작가의 이전글 책 다시 보기, 아이 덕에 얻은 의외의 작은 소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