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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Apr 23. 2022

사랑 담당

신학기가 되면 학교는 학생들의 특성과 가정환경 등을 파악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자기소개글과 가족사항 등을 간단하게 적어 제출하게 한다. 부모 연락처를 적고 있는 내 옆에서 자기소개글을 꾹꾹 눌러쓰던 딸이 갑자기 묻는다.


“엄마, 나는 집에서 무슨 역할을 해요?”


무슨 말인가 싶어 학교에서 준 자기소개글의 문항을 힐끔 보니, 마지막 질문이 ‘집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요?’였다. 아, 이것 참 재미있는 질문이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


“아, 이거? ‘사랑 담당’이라고 쓰면 되겠네.”


아이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 그건 답이 아닌 것 같아요. 다른 거 없어요?”

“왜? 너 사랑 담당 맞잖아. 네가 맛있는 것을 엄마 아빠한테 나누어 줄 때, 손하트를 날릴 때, 아빠 엄마를 안아줄 때마다 딸이 부모님을 엄청 사랑한다는 게 정말 느껴져서 얼마나 기분 좋은데."

“아니, 그래도 그건 좀...... ”

“생각해봐. 네가 집에서 밥을 해? 빨래를 해? 청소를 해? 안 하잖아. 너는 그냥 엄마 아빠에게 사랑만 주고 있어요.”

“아, 쪼옴. 엄마아~~”


밥, 빨래, 청소 중 어느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딸은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의 역할을 ‘사랑 담당’이라고 쓴 자기소개글을 학교에 제출했다.




나의 엄마는 '가족의 일원이면서 집안일을 하지 않을 거면 밥도 먹지 말라'라고 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조금은 강제적으로 집안일을 시키셨다. 청소하기, 빨래 개기, 과일 깎기, 식사 준비 돕기, 엄마가 시장 갈 때 따라가서 짐 들어주기 등의 가족의 일상 유지에 필요한 여러 일들을 자녀들의 나이에 맞게 맡기셨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인 나는 이부자리 정리와 동생과 놀아주기를, 고등학생인 첫째 언니는 도시락 싸기를, 중학생인 둘째 언니는 설거지를 맡겼다. 동생은 막내라는 이유로 다른 자매들보다 늦은 중학생이 된 후부터 집안일을 분담했지만 어쨌든 엄마의 지휘 아래 자매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춰 집안일을 나누어했다.


엄마는 칭찬과 질책을 적절히 구사하시며 자식들에게 집안일 참여의 동기를 부여하셨다. 내가 삐뚤빼뚤하게 깎아온 과일을 보고 엄마는 늘 예쁘게 잘 깎았다고 칭찬을 해주셨고, 나는 다음에는 더 예쁘게 깎아서 칭찬을 또 받으려고 과일 깎는 일은 내가 맡겠다고도 했다. 새벽 미사에 엄마와 함께 가는 것도 내게 주어진 일 중에 하나였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정말 힘들었지만, 매일 새벽 미사에 오는 훌륭한 어린이라는 신부님의 칭찬과 엄마가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아서 새벽마다 눈을 비비며 힘겹게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일을 안 하면 밥을 안 준다고 겁을 준 엄마가 조금은 야속했지만 그 말씀을 믿은 덕에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중요한 집안 대소사를 결정한 것도 아니고 대단히 많은 양의 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집안일을 하면서 우리 가족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내가 맡은 일을 하지 않으면 언니나 동생이 그 일을 하게 된다 것, 그렇게 되면 서로 다투게 된다는 것, 일을 미뤄두면 집안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각자가 책임지고 맡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가정을 꾸려나갈 때 필요한 일을 선별하는 법, 일의 우선순위 정하는 법,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 맡은 일은 반드시 한다는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요소들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 같다.


가족 내에서 아이의 역할에 대해 적어오도록 한 선생님의 의도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학생에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려면 구성원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하고 일을 맡았으면 책임감 있게 해내야 한다는 것을, 부모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고 있다. 아이에게 뭔가를 시킬 만큼 집안일의 규모가 크지 않고 아직은 손이 서툰 아이에게 일을 맡기느니 내가 후딱 해치우는 게 더 효율적이어서 일을 주지 않고 있다. 적당한 나이가 되면 아이에게 일을 줄 것이라 말은 하지만, 딸이 중고등학생이 되면 공부하기도 바쁜데 무슨 집안일이냐면서 일을 시키지 않을 것이고, 입시가 끝나면 결혼 후에 지겹게 하는 게 집안일인데 왜 벌써부터 하냐며 그냥 있으라고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이가 손하나 까딱 안하게 만들수록 나의 아이는 스스로 정갈하게 생활하는 법을 집에서는 배우지 못할 것이다. 또한 필요한 일을 선별하여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 일을 완수하는 책임감 등 내가 집안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들을 익힐 기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현명한 부모들이 자녀에게 집안일을 부여하는 이유가 단순히 부모의 가사부담을 더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사회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감을 경험하게 하는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아이가 혼자 밥도 못 챙겨 먹고 방 정리도 못하는 덜 큰 어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이번 주말부터 딸에게 자기 방 청소를 시켜야겠다. 더럽게 청소를 해도 내가 다시 해주지는 않을 거다. 아침에 먹을 사과와 오렌지를 깎아보라고 해야겠다. 서툰 면이 보여도 조금 참고 나의 부모님이 하셨던 것처럼 '잘했다, 다음번에는 더 잘할 거다'라고 칭찬을 쏟아부어 딸이 가족의 일원으로 참여할 동기를 부여해 봐야겠다. 자녀를 건강한 어른으로 키운다기보다 최소한 자기 밥은 스스로 챙겨 먹고 주변정리는 혼자 할 수 있는 정도로는 키워야 할 것 같다.


어제 저녁,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티비를 보는 딸에게 넌지시 물었다.


"딸, 넌 우리집에서 어떤 존재니?"

"음......  난 사랑 담당이지. 그렇지."


에그그, 내가 정말 학기초에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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