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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Jun 18. 2022

힘은 빼는 게 정답

저는 남들이 한번 보면 이해할 것을 세 번은 봐야 이해하는, 속도가 좀 느린 사람입니다. 어쩌다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고 연구직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요, 이 바닥에는 머리가 좋고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척하면 탁하고 알아듣고 하나만 알려줘도 열 개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지요. 저같이 느린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해요. 좀 피곤하기는 하지만 체력이 금방 떨어지고 일정을 빡빡하게 운영하는 것만 익숙해지면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잘 지낼 수 있지요.


저도 똘똘이들 사이에서 아직까지는 꽤 잘 지냅니다. 혼자 연구할 때에는 제 속도에 맞게 일정을 짜면 되고 공동연구를 할 때에는 제가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 동료와 일의 속도를 맞추면 되니까요. 공동작업을 할 때 저로 인해 일정이 늦어지거나 품질을 맞추지 못하는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올해는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공동연구에서 제가 맡은 부분의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요. 머리가 굳어버렸는지 공동연구자 A가 하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처음에는 이 주제를 거의 10년 가까이 다루고 있는 A와 잊을만하면 한두 번씩 들여다보는 저와의 지식의 수준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게 이번 주제로 웬만큼 토론할 수 있을 만큼 학습할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저의 지식수준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과거 비슷한 경우에는 금방 따라잡았었는데요, 이번에는 이상하게 잘 안되었어요.


A와 제가 연구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결과가 도출이 되는데 제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둘 다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헤매고 있는 저를 돕기 위해 A는 매일매일 여러 가지를 땀나게 설명을 해주었고 저도 그의 노력에 뒤지지 않으려 눈이 빠져라 따라갔습니다만, 풀지 못하는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제 머리는 돌처럼 굳어진 것 같았고 나중에는 굳어진 머리가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연구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나 약속한 날짜에 맞춰 결과를 가져갈 수가 없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저는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자신감이 떨어져 더 위축되었고 머리는 더 안 돌아갔어요. '왜 이걸 이해 못 해?'라고 말하고 싶은데도 꾹 참는 것 같은 A를 볼 때마다 미안함을 넘어 창피한 생각이 들었고요.  


저에 대한 A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낼 즈음인 지난 금요일, 다행히 실마리 하나가 풀리면서 제가 맡은 부분에서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니 막힌 수로가 뚫리듯 순식간에 산출물을 뽑아냈 수 있었어요. A에게 느지막이 보고서를 넘기면서 속도를 맞추지 못해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습니다. 짜증을 낼 법도 한데, A는 이제 산을 하나 넘었으니 이후 작업은 술술 풀 리거라며 오히려 제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어요. 저를 비난하지 않은 A가 정말 고마왔습니다.


퇴근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17년 동안 이 직장에서 꽤 인정받으며 일해왔는데 한계가 온 것 인가? 그동안 지식을 채우지는 않고 퍼다 쓰기만 해서 이제는 한 조각의 아이디어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일하기가 싫어진 진짜 속마음이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발현된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상황에 있는 제가 초라해 보였고 또 실망스러웠어요.


계속 이유만 되씹다 보면 기분이 더 가라앉을 것 같아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운동가방을 챙겨서 체육관으로 갔습니다. 땀을 많이 내면 낼수록 빠르게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서, 오늘은 데드리프트의 무게를 지난번보다 더 올리고 세트 수도 늘려달라고 코치 선생님께 부탁을 했죠. 뭐든 다 들어 올리겠다고 마음먹고 코어와 다리에 힘을 주어 바벨을 들어 올리는데,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못 들겠는 거예요. 다시 발바닥과 허벅지, 단전과 두 팔에 힘을 딱 주고 바벨을 끌어올렸습니다. 이번에는 바벨은 들었는데 자세가 흐트러져서 허리로 힘이 빠졌습니다. 최악의 자세가 된 거죠. 코치 선생님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회원님, 잘하려고 몸에 너무 힘을 주면 더 못하게 되어요. 심호흡 한번 하시고, 힘 빼세요. 힘."


아! 맞다. 힘! 힘 빼야지. 그 순간 딱 떠올랐습니다. 내가 요즘 헤매고 있는 이유가 힘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잘 모르는 주제라는 게 부담스러웠고 중요한 프로젝트이니 성과를 분명하게 내야 한다는 말이 압박이 되어서 너무 힘을 주고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긴장이 계속되면서 창의적인 뇌 활동이 방해를 받았을 것이고, 쉽고 단순하게 풀면 될 것을 어렵고 복잡한 논리로 설명하려 했더라고요. 어려운 일일수록 심호흡을 하고 힘을 빼고 한 발짝 물러서서 편하게 생각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힘 빼기가 필요한 순간에 저는 오히려 힘을 너무 많이 주었더군요.


그래요. 일이든 운동이든 힘을 빼고 임해야 해요. 심지어 김치볶음밥을 할 때도요(웍을 너무 꽉 쥐고 돌리면 승모근이 긴장해서 요리하고 나서 어깨가 엄청 아파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수록 심호흡을 한번 더 하고 힘을 한번 더 빼야 해요. 회사에 저와 공동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좀 있고, 제게 간간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는 걸 보면 능력의 한계가 왔다거나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고 할 단계는 아닌 것 같죠? 이렇게 매번 일에 대해 고민하는 걸 보면 일하기 싫어 죽겠는 상태도 아닌 것 같고요. 그러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힘 빼는 연습이나 잘해야겠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심호흡 한 번에 어깨 힘 빼기 한번, 심호흡 두 번에 등판 힘 빼기를 해야겠어요. 그리고 저녁에는 내게 깨달음을 준 웨이트 운동을 더 열심히 하고요. 러다보면 어느 날 저는 힘 빼기의 달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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