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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Sep 03. 2022

이렇게 또 나와 싸워 이깁니다

지난주 화요일, 회사 서열 2위 간부가 우리 팀에 맡겼던 보고서를 간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보고서 책임자인 나와 공동연구자는 팀장의 지휘 하에 탄탄한 논리와 사례분석까지 곁들인 완성도 있는 보고서를 마련했지요. 보고서를 리뷰한 다른 팀장과 국장들이 꽤 잘 썼다는 평을 하였기에, 우리 팀은 보고가 무난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보고를 받은 간부는 원하던 내용이 일부만 반영되었다고 탐탁지 않아했죠. 보고를 중간에 멈춰야만 했던 팀장은 간부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당황했고, 보고서의 책임자이며 기여도가 가장 많은 나 또한 좌절했어요. 두 달 넘게 고생 고생해가며 만든 결과물이 이런 비참한 평가를 받다니, 그 이유가 수요자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데 있다니, 수요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나는 왜 수요자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지 못했는지, 나만의 논리에 빠져 수요자를 살피지 않은 나의 안이함에 너무 속상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안 좋으니 며칠 동안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요. 근데 수정보고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어서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의욕을 끌어올리려고 제가 아는 나름의 방법을 다 동원해 봤습니다.


우선 새벽 산책을 했어요. 해뜨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에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부지런하게 삶을 지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려고요. 도로를 치우는 청소부, 편의점에 물건을 배송하는 물류 트럭 기사, 일터로 가기 위해 첫차를 기다리는 직장인, 백팩 가득 터질 듯 책을 넣어 도서관으로 가는 학생. 이렇게 성실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힘이 생깁니다. 벽에 부딪혀 내려앉아 있는 제가 한없이 작아 보이고 투정 부리지 말고 부지런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땀을 내는 운동도 의욕을 올리는데 효과적입니다. 보고가 끝난 다음 날부터 나는 점심시간에 회사 체육관에서 속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어요.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운동 후 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 숨이 차오를 정도로 운동 강도를 높였지요. 땀과 함께 낮아진 자존감이 배출되는 것 같았고, 강한 운동을 견뎠다는 성취감을 얻은 덕분에 운동을 한 날의 오후는 하지 않은 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 졌습니다.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도 유용해요. 당장 염색약을 사서 새치머리를 감추고, 미용실에 달려가 한 달 동안 자란 머리카락을 서걱서걱 잘랐습니다. 나에 대해 실망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카락에 붙어 잘려나가는 것 같았고,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이 미용 보조사의 빗자루에 쓸려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아주 조금 후련했습니다.


사실 이런 몇 가지 변화로 의욕이 금방 돌아오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실망과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무엇보다 의욕상실에 대응하는 방법이 효과가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응하려고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보면 저는 이번에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 같네요. 계속 이렇게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을 쌓아 작은 일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단단한 자아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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