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가 건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기에 잘 걸리지 않고, 혹시 걸리더라도 해열제(타이*놀, 애*빌 같은) 먹고 일주일 정도 쉬고 나면 벌떡 일어나는 편이죠. 또래보다는 체력도 나은 편이었고 잠도 푹 잘 자고 관절이 아프거나 인대가 약하지도 않아요. 식탐 혹은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많이 먹어서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위장장애를 겪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목이 아프네 코가 막히네 기침이 심하네 하며 이비인후과와 내과를 동시에 들락거리는 남편과 아이에 비하면 나는 정말 튼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니들과 동생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잔병은 없었지요. 건강을 자신할 정도는 아니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올해는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에 문제가 많았어요. 연초에 허리통증에서 시작한 나의 병치레는 자궁에 생긴 문제아들을 제거하는 시술을 거쳐 한 여름에 발수술로 정점을 찍고, 가을에 목디스크 치료를 지나, 갑상선에 생긴 문제 녀석들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에는 발수술 때 삽입한 고정핀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였고(또! 수술을 했어요.), 송년파티를 해야 하는 오늘은 빈혈약과 콜레스테롤약을 먹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두 손 가득하게 처방약을 받아 귀가했습니다. 허허, 건강문제로 이렇게나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받아온 약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내가 참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좀 많이 이상하다고 했더니, 남편이 이게 무슨 말 이래 하며 돌아봅니다.
"올해 마누라가 병원을 좀 많이 다니기는 했지. 근데, 건강하다니, 이게 무슨 말? 잘 생각해 봐. 당신은 크게 아팠고, 병원 여러 곳을 몇 년 간 쭈욱 다니고 있잖아. 잔잔하게 아픈 게 아니었을 뿐이야. 착각하지 말어."
아! 맞다. 나는 잔잔하게 아픈 게 아니라 크게 크게 아팠지.
그래요, 저는 가끔씩, 큰 병치레를 했어요. 20대에서 30대 넘어갈 즈음에 좀 아팠는데, 그때 쓰던 약이 꽤 강력해서 몸무게가 지금의 반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쇠약해졌었죠. 그 일로 지금도 3개월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고요. 40대 후반에는 8개월 간 휴직하면서 크고 작은 수술을 세 차례나 했었죠. 후속 치료를 하느라 무려 5년 간 약을 와장창 먹기도 했고요.
이런 과거가 있었는데도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듯이 아팠던 기억을 싹 잊고 제가 건강하다고 여겼어요. 이런 착각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잘 회복하여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하게 되자 그냥 옛날을 잊은 겁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픈 동안에는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고 수술이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이 시기만 잘 버티면 일상생활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려 했고, 재발이나 합병증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었죠. 운 좋게 바람대로 되었고 그때의 간절함과 고마움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했건만,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여 상황이 좋아지니 다 잊고, 그냥 나는 처음부터 건강했던 거라 여기는 겁니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나쁜 경험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건강하다'라는 자기 암시를 한 효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니까 진짜로 건강한 줄 알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라는 거죠. 사실 둘 다 말이 안되는 이유이지만 굳이 고르자면 후자가 조금 더 매력적인 해석입니다.
문득, 올해 여기저기 아팠던 건 질병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건강에 대한 교만함을 버리라는 시그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인데 몸을 돌보지 않았던 내게 내 몸이 보내는 경고 같기도 하고요. 마음 새롭게 먹고 몸을 챙겨야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새해에는 올해보다 두 배는 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족) 연말이 되어서 그런지 내 몸 불편할 때, 참아주고 도와준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옛날 내 짜증을 몽땅 받아준 언니, 동생에게 치킨 쿠폰을 보내야겠습니다. 내일은 거동 불편한 마누라의 머리를 '대충' 감겨주던 남편에게 동네 제일가는 커피맛집에서 게이샤 커피 한잔을 사주고, 발 못쓰는 엄마를 위해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주고 심부름도 곧잘 하던 딸에게는 최애 간식 치즈케이크 한판을 선물해야겠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