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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농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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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언화가 Feb 28. 2022

귀촌 일기 ] 내게 맞는 땅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싹틀 때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여성호르몬의 변화는 부정과 우울감이라는 감정 지진으로 나를 흔들곤 한다. 종종 잔잔한 약진으로 끝나지만, 가끔은 모든 감정선을 무너뜨릴 만큼 심한 강진이 되기도 한다. 


부정적 감정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자책과 후회라는 감정을 끌어오고, 한번 찾아든 후회라는 감정은 떠날 줄 모르고, 과거의 모든 순간들을 사진첩 사진을 꺼내듯 보여준다.


무너진 자존감이라는 집 안에서 '왜 나는 잘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선다. 좀 더 잘할 걸. 그때 그랬다면 전혀 다른 현실이 내 눈앞에 있었을 텐데라는 끝없는 되물음으로 땅굴까지 파고드니 말이다. 


하지만, 지진에 무너진 집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재해로 인해 무너진 집을 보고만 있노라면, 뒤이어 내릴 비도 바람도 모두 다 막을 수 없고, 결국 남아있는 것마저 모두 망가질 테니. 할 수 있는 건, 강한 감정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집을 짓는 수밖에 없다. 


감정의 견고한 집을 완성하기 위해 향하는 곳은 집 앞, 논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논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나무 아래다. 귀촌한 지 1년. 2년 파견이라는 기간을 정하고 이곳, 농촌으로 이사를 온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처음에 낯설게 느껴졌던 시골 생활은 어느덧 익숙한 여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친해진 나의 아낌없이 듣는 나무.


나무에 기대고 앉아, 천천히 마음을 들여다본다.

흔들린 마음속에 실수한 내 모습이 보인다. 실수를 되돌릴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든 시선의 끝에 초록잎을 뻗어낸 냉이가 보인다. 아직은 쌀쌀한 겨울바람에 초록잎을 흔들며, 냉이가 답한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과거는 지나가게 놓아줘.'

냉이의 말이라고 했지만, 내 안의 나에게 듣는 자문자답이다.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지 못했다고 슬퍼하는 꼴이다.


농사를 지어보면 안다. 땅에게 맞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연에서는 그러지 않았음을 자연은 결과를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더 나은 계획을 세우고, 식물마다의 적절한 땅을 찾게 된다. 농사꾼에게 지나간 결과를 보며 한탄할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봄,여름,가을,겨울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시기를 놓치면 적절한 수확을 할 수 없다. 잘못된 선택과 실수는 그 다음 농사에 반영할 것이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식물마다 맞는 땅이 있듯, 각자에게 맞는 삶의 자리가 존재한다. 이런 자리의 적절함은 단순히 후회와 자책만으로 알 수는 없다. 경험을 통해 깨닫고 적용하며 경험이 준 교훈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길을 찾아가는 거고, 이런 과정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에 성공하는 삶은 없다. 


자연이 건네는 삶의 지혜.

자연에 머물며 인생에서 풀리지 않던 작은 고민과 큰 걱정들이 하나씩 해결되어 간다. 그 지혜를 조금 더 담고자 올해는 직접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300평 남짓한 땅도 마련했다. 


며칠간 삶을 휩쓸고 간 감정 지진의 흔적을 정리하며, 앞으로 자연이 줄 인생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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