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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Dec 08. 2019

둘이 합쳐 60살입니다.

환갑이네요.


터키 여행이 딱 절반 정도 지났을 때, 우리는 야간버스를 타고 안탈리아로 향했다. 사실 안탈리아는 이동경로를 고려하면 넣지 않는 게 더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주 남짓한 기간은 길지는 않지만 매일 강행군을 하기에는 힘든 기간이다. 우리는 쉬기 위해 야간버스를 타고 안탈리아로 향했다.



안탈리아는 지중해 연안에 붙어있어서 기후가 온화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도시로 발달하였다. 로마 시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나는 아직도 터키를 생각하면 우아한 블루모스크나 신비로운 카파도키아의 동글 대신 안탈리아가 생각난다. 아마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나의 취향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안탈리아에서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맛있는 터키 조식을 먹고 동네 산책을 했다. 유명한 하드리아누스의 문이나 이블리 미나레가 모두 지척에 있었다. 칼레이치 거리에 있는 호텔과 카페, 레스토랑들은 지중해답게 외관이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예쁜 빛깔이었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커피를 시키고 각자 책을 읽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시간이 멈춘 가운데 내 머리카락만 간들간들 움직였다. 아마도 그때의 바람과 커피와 조용하지만, 가득 차 있던 시간이 안탈리아를 기억하게 하는 것 같다.




우리가 머물렀던 호텔은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묵는 곳이었다. 안탈리아는 유럽의 은퇴한 노인들이 휴양하기 위해 오는 도시로 유명하다. 우리는 호텔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거의 유일한 젊은이들이었다. 조식을 먹기 위해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일 때, 밤에 칵테일을 시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 지나가던 호텔 투숙객들은 우리를 한 번씩 꼭 쳐다보고 지나갔다.


하루는 호텔 수영장의 베드를 이용하고 싶었다. 수영장은 깨끗했지만 더운 날씨는 아니어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수영장 베드는 딱 2자리 남겨두고 만석이었다. 우리는 남은 2자리를 차지했지만, 문제는 파라솔이 접혀 있었다. 그전까지 휴양지를 제대로 가본 적이 없던 우리는 파라솔을 펴는 방법을 몰랐다. 어설프게 이것저것 건드리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한가로이 책을 읽던 노부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멋쩍은 눈인사를 건네자 할머니가 눈을 찡긋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조종했다.



"Mike, why don`t you help with those little kids?"



영어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뉘앙스는 저랬다. 리틀키즈? 둘이 합쳐 도합 60살인 우리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이 할아버지가 천천히 다가와 한 번에 파라솔을 쫙 펴주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파라솔에 반쯤 누웠다. 책을 가져왔지만, 사실은 낮잠을 자고 싶었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친구와 달리 나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불을 꺼야 자는 타입이다. 터키까지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제대로 잠이 들지 못해 쿨쿨 잘만 자는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낮잠을 자기 위해 누웠으나 눈은 말똥말똥했다.



"역시 못 잘 거 같아. 책이나 읽어야지"



난 친구에게 나의 다짐을 들려주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3분이나 지났을까….



"드르렁~"



코 고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다. 친구를 바라보자 황당한 표정을 짓고 날 보고 있다.



"나 잤어?"

"어. 못 자겠다며 ㅋㅋㅋㅋㅋ"



친구는 그 자리에서 날 흉내 내며 놀렸다. 나 역시 당황스러우면서도 웃기다. 못 잘 거 같다고 세상 예민한 척은 다 해놓고 5분도 안 되어서 잠들다니. 계속 먹고 놀아서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잠에 빠져들었다. 내가 코 고는 소리에 놀라서 깨서는 멋쩍어서 다시 잠들지도 못했다. 그 뒤로 아직 한 번도 선베드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다. 아쉽다. 잠이 솔솔 왔을 때 기분 좋게 푹 자보는 건데.






우리가 서양인들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듯이 서양인들도 동양인들의 나이를 맞추기는 어려운 것 같다. 30살인 우리를 보고 20살이냐고 말을 걸어왔던 이스탄불의 대학생과 우리를 리틀키즈라고 지칭했던 안탈리아의 유럽 할머니까지. 이미 앞자리가 3인 우리를 자꾸 little kids라고 불렀다. 카파도키아에서 같이 투어를 했던 이탈리아 여행객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계속 힐끔힐끔 우리를 주시했다. 우리 또한 그들을 주시했다. 반나절 동안 봉고차를 타고 다니며 투어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끼리 하는 말 사이사이에 little kids 어쩌고가 계속 들렸다. 욕한 건 아니길.



"야, 마리오 신발 끈 풀렸어"

"저러다 밟으면 큰일 날 텐데, 알려주고 와"

"네가 말해!"



이탈리아 여행객 중 한 남자가 우리 눈에 띄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인처럼 생겼고 초록색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몰랐고, 멋대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리오 다리가 후들거려"

"지금 이거 하이킹 좀 했다고 후들거리는 거야?"

"거기에 힘이 없네. 부실해"



초록색 점퍼와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가 우리에게 친숙한 게임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수퍼마리오. 초록색 옷을 입은 건 마리오의 친구(?), 동생(?) 이었던 루이지였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마리오로 지었다.


우리는 하이킹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마리오를 주시했다. 별 이유는 없었고 우연히 초록 점퍼를 입은 그가 그날 우리 여행의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아마 마리오도 우리의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동양인 여자애 둘이 속닥속닥 대며 자신을 보는 눈빛을.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대화가 길어지면 영어를 계속할 자신이 없었기에 말을 걸지 못했다. 그리고 딱히 할 말도 없긴 했다. 너 혹시 닌텐도라고 아니? (정말 동양인 덕후같다)


아마 우리가 마리오와 그 일행들을 소재로 삼아 그날 하루 내내 즐겁게 보냈던 것처럼 아마 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저 어린애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중국? 일본? 음,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렸을까? 어쩜 마리오와 그 친구들은 우리를 보며 이런 대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저 리틀키즈들이 너에게 반했나 봐. 자꾸 너만 보고 있어."

"Gee, 인기 많은 남자는 힘들군."

"가서 네가 결혼했다고 알려줄게"

"그건 그들에게 너무 가혹해. 리틀키즈들의 핑크빛 환상을 깨지 말아줘"



사실 우리는 1시간 하이킹 후 급격히 후들거리는 마리오의 다리를 보며 정력이 약하다며 흑마늘을 추천해주고자 했다. 마리오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끝내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투어 마지막 해산할 때 호텔 로비에서 뻣뻣한 다리를 이완시키기 위해 우리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그때 스트레칭을 하는 우리를 보며 마리오는 소심하게 따라 하다가 우리가 쳐다보자 그만두었다. 다리에 힘도 없고 용기도 없는 그대여.



둘이 합쳐 도합 60살인 우리는 아직도 이런 식으로 논다.






그때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우리를 계속 어리게 보니 신기했고 솔직히 기분도 좋았던 것 같다. 어리다 어리다 하니 진짜 어려진 기분? 그리고 최근에 터키 여행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분홍색 바람막이와 카키색 점퍼를 입은 나와 친구가 어찌나 앳되어 보이던지. 사진 속에서 정말 신경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온 근육을 풀어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정말 행복한 여행이었던 것 같다. (어찌나 즐겁게 웃고 있는지 못 보여줘서 아쉽다) 그때 당시에는 30살이 되기도 했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n년이 지나서 보니 그때도 아직 어렸었구나, 미숙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지금의 나는 성숙한가? 아마 앞자리가 4로 바뀐 후에 보면 그때도 어렸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항상 아직 어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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