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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Mar 30. 2020

가장 높은 곳에서 내가 거지라니

가장 사치를 부린 곳에서 겸손함을 찾다


인생 최초의 비즈니스석 체험은 퇴사와 함께 이루어졌다. 전 회사는 재직 10년이 되면 백만 원이 나오는 데 운이 좋게도 내 퇴사 일정과 맞물려서 백만 원을 받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이직이 한 달 혹은 이 주 정도 빨리 결정되었다면 그대로 백만 원이 허공에 날아갔을 텐데. 타이밍도 참 좋다.



받은 백만 원은 그대로 발리행 비행기 표 값으로 쓰였다. 이직으로 인한 퇴사는 언제나 갑작스럽다. 그냥 백수로 퇴사했다면 시간이 남아서 조금 여유로운 일정으로 저렴한 비행기 표를 찾았겠지만, 나에겐 여행을 갈 수 있는 일정이 딱 2주였고 그것도 바로 2주 후의 비행기 표를 사야 했다.



어디를 갈까 고민이 많았다. 일행을 찾을 수도 없는 갑작스러운 여행. 일본은 분위기상 패스. 사실 유럽을 가고 싶은데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풀로 유럽을 가기엔 내 시간과 체력이 마땅치 않았다. 그럼 동남아인데 휴양지를 혼자 가기는 좀 그렇고. 이것저것 제하다 보니 발리가 남았다. 발리는 휴양지이지만 혼자서도 많이 가는 것 같고 검색을 해보니 다른 휴양지보다 조금 더 안전한 것 같았다.



발리 비행기 표는 비쌌다. 이제 늙은이라 저렴한 경유보다는 비싸도 직항인데 대한항공 직항이 약 70만 원. 저렴한 가격은 아니라 이런저런 조건을 바꾸어서 스카이스캐너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좌석 필터를 이코노미석에서 비즈니스로 바꿔보았다.



그랬더니 말레이시아 항공 경유 비행기 비즈니스석이 약 90만 원이었다. 와. 비싼데...싸게 느껴져. 왜냐하면, 비즈니스니까! 경유와 직항의 차이가 있지만, 국적기와 외항사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비즈니스와 이코노미석이 20만 원 차이라니? 말레이시아항공...무슨 사고 나지 않았나? 근데 비즈니스를 탈 수 있어. 70만원이 비싸서 차마 결제를 못 하고 있던 나는 홀린 듯이 90만 원을 결제했다. 이걸 조삼모사라 하나? 다른 한자어가 있을 거 같은데...



나 비즈니스 탄다!!! 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내 돈 주고 가는 거지만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10년 직장 생황을 마무리하고 잠시 휴가를 떠나는데 비즈니스를 탄다. 뭔가 인스타에 써놓고 싶은 감성이었다.



출국 당일. 오전 11시 비행기라서 너무 늦지 않게 나왔다. 공항에 제시간에 도착해서 체크인했다. 난생처음으로 [비즈니스]라고 쓰여있는 화면 앞에 섰다. 비즈니스 발권을 하는 곳은 이코노미 발권 코너에 손님이 몰려서 잠시 이코노미 발권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 뒤에 대기하자 다른 손님 발권을 도와주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마침 비어있던 코너의 직원에게 작게 소리쳤다.



"여기 비즈니스석 발권 도와주세요!"



대기 시간이 줄어드니 공항에서 시간이 남았다. 보안을 통과하고 면세품을 찾고 대한항공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담아 먹으며 컵라면을 살펴보았다. `저거 두 개만 가져가서 발리에 가서 먹어야지...` 그리고 인터넷을 좀 하다가 라면은 잊어버리고 비행기를 타러 갔다.


라운지에서


비행기 타는 것도 1순위.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남는다. 매일 공항에 오면 3시간 전에 와도 뭔가 바빴는데 좋다. 이제 언제 탈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즐겨야 한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니 내 자리가 보인다. 6A.

넓다. 수납공간도 넉넉하다. 촌스럽게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절로 카메라로 좌석을 이곳저곳 찍었다. 이제 다시 탈 일 있겠어. 좌석에 앉으니 승무원이 다가와 웰컴 드링크를 골라보라고 했다. 난 주스보다는 생수 파여서 물 한잔을 주문했다.



내 자리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여러 가지 버튼도 눌러보고 넓은 모니터도 보고 영화는 모 있나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주 자그마한 무언가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환전.......했나?`




그리고 깨달았다.




`은행을 안갔어`

`은행을 안갔어!!!`

`은행을 안갔어!!!!!!!!!!!!!!!!!!!!!`




나는 며칠 전에 모바일 환전을 했다. 공항에서 할 일은 지하 1층에 있는 우리은행에 가서 환전한 걸 찾아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안갔어. 까맣게 잊고 있었어. 시간이 그렇게 남았는데. 아직 이륙 전이다. 어떡하지? 소리쳐야 하나? 잠시만요!! 저 내려야 해요!!! 돈이 없어요!! 아니 근데 내리면 어떡하라고. 다시 기다려주진 않을 거 아냐. 이륙 5분 전인데. 내려주지도 않겠지만 5분 안에 다녀올 수 있어? 1분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발리 환전을 알아보다가 사실 해외 인출이 가능한 체크카드가 생각났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나도 하나 있는데 이게 사용을 한 지 오래되면 카드 인출이 잠겨버려서 은행에 가서 풀어야 한다. 유럽에 갈 때는 그래도 은행에 가서 미리 사용제한을 풀었었는데 그때는 너무 귀찮았다. 해당 은행이 회사에서 좀 멀기도 하고 환전 빵빵하게 할 건데 뭐하러. 하는 생각. 그런데 그거라도 해야 했다. 근데 안 했다. 정말 돈이 없다.



심장이 뛰고 귀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다. 물론 신용카드가 있긴 하지만 리조트 안에서만 생활할 것도 아니고 발리는 현금이 필요한 나라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에 한계가 생긴다. 여행 일정을 다 바꾸어야 할 판이다. 그때 내 옆으로 승무원이 지나갔다. 얼굴을 보니 100% 한국인이다!



"저기여..."



한국인 승무원분께 내 사정을 말하고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승무원은 해외를 자주 나가니 경험이 많을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내 사정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승무원은 나에게 해답을 내려주었다.



"신용카드 해외 현금서비스를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본인이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남이 그렇게 하는 걸 보셨다고. 급하게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현금서비스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우선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내가 가진 카드가 마스터카드 딱 1장인데 이 카드로 과연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 이륙시간이 지났는데 비행기는 아직 활주로에 멈춰있다. 얼른 카드사로 전화했다. 다행히 내가 가진 카드는 해외현금서비스가 된다고 한다. 그제야 몸에서 힘이 풀렸다.



몸에서 힘이 풀렸지만, 심장은 계속 두근거렸다. 우선 한시름 놓긴 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현금서비스...잘 될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 결국, 이륙하자마자 술을 달라고 했다. (당시 퇴사 때문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다녀서 여행 중 금주를 하려고 했다) 말레이시아 항공이라고 전통 음식인 사테를 준다. 사테와 와인을 함께 마시니 조금 더 긴장이 풀렸다. 이미 이륙했는데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난 의자를 평평하게 만들어서 다리까지 뻗고 모니터로 한국영화를 봤다. 한국영화는 딱 한 편 있었다. 엑시트. 아까 비행기를 뚫고 은행에 다녀오고 싶었던 내 마음을 꿰뚫는 영화였다.



낮 비행기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의자를 완전히 평평하게 하고 누워보았다. 와 이대로 20시간도 가겠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남아있다. 낯선 곳에서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 몸 어딘가가 매우 불편했다. 비즈니스석에서 세상 편하게 누워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 몸도 편치 않은 느낌. 앞으로는 공항에 도착하면 발권이 먼저가 아니라 환전이 먼저다.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은행이다.  


경유를 한 번 하고 발리 덴파사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내 은행으로 갔다. ATM 기기에 카드를 넣고 이것저것 눌러보는데 잘 안 된다. 다행히 와이파이가 아주 잘 터지는 공항이어서 네이버로 검색하면서 버튼을 눌렀다.


ATM기가 돈을 내뱉는 순간, 정말로 모든 긴장이 풀렸다. 우선 시험삼아 소액만 뽑아본 건데 얼마 되지 않은 적은 금액이 손에 들어오자 너무 안심이 되었다. 난 돈이 있다. 이걸로 택시도 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다. 정말 새삼스레 돈의 소중함을 저 높은 하늘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비싼 돈을 주고 비즈니스를 타고서는 현금이 없어 그렇게 불안해하다니. ATM에서 나온 돈을 소중히 가방 속에 꽁꽁 넣었다. 내 소중한 돈. 적은 금액이지만 빈털털이에게는 전부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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