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비가 조금 온다는 예보를 들었다.
사실 그 시간에는 온 가족이 집에서 취침 준비를 하는 때이기에 정말 0.8mm의 물방울이 떨어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는데 볼을 감싸는 공기가 차가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체가 알려주는 온도는 생각보다 정확했다.
당연하게도 집을 나서는 모든 구성원들의 옷 두께는 갑작스레 두꺼워졌다. 그럼에도 현관을 나서는 순간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차가움과는 별개로 여전히 해맑음을 유지하는 생명체는 존재한다. 바로 전두엽 발달이 온전히 완료되지 않은 꼬마 인간들. 학교 앞 아이들은 입으로는 춥다고 발을 동동대지만 신호등 앞에 삼삼오오 몰려서 자신들의 주말을 브리핑하느라 바쁘다. 매일 학교에서 만나면서도 뭘 그리 할 말들이 많은지. 추움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들은 오직 그들 옆에 서 있는 학부모들의 표정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댄다.
잠시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돌려 보아도 이상하리만큼 거센 공기는 멈추는 법이 없다. 몇 초를 기다리다 서둘러 집 안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다리를 서두른다. 새삼 추위를 막아 줄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눈앞을 막아서는 겨울바람을 조금이나마 피하고자 고개를 돌리고 가자미 눈을 한다. 그리고 1초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잰걸음을 더욱 재촉해 본다.
비밀번호를 누른 후 현관을 통과하니 그제야 훈풍이 두 볼을 맞이한다. 집을 떠난 이들의 잔해들을 정리하던 차에 거실 창을 통하여 바깥을 바라보았다. 추위에 거센 강풍이 부는지 창 밖 도로의 가로수들은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어깨까지 굽혀가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오늘은 더 이상 바깥 나들이를 꿈에도 꾸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겉옷을 벗어도 서늘함 그 이상을 느끼지 않는 아늑함. 그와는 반대로 세상의 풍파를 오롯이 견뎌내는 나무. 어쩌면 집이라는 고마운 존재 덕분에 내가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길가의 나무들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나는 이제 따뜻한데 그 바람을 다 맞고 있는 나무들은 갈 곳이 없구나.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아이들이 상당히 기특해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멋있어 보인다.
태양이 주는 뜨거운 햇볕에는 공간 하나 없이 빽빽하게 푸른 잎사귀들을 자랑했던 존재. 조금씩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기 시작하니 피가 나는 것처럼 붉게 물들여서 가을이 왔다고 너나 할 것 없이 광고를 해 주었다. 그리고 엄청난 추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온몸에 있던 잎들을 서둘러서 떨어냈다. 어쩌면 나의 예상과는 달리 거센 바람에 맥없이 붉은 잎들을 빼앗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지나면서 털 하나 없이 앙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신기한 것은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도 불구하고 굽힐지언정 절대 부러지는 법이 없다. 딱 한 번 방문했던 제주도의 한 여름이 떠오른다. 운 때가 맞아 여름 태풍을 마주했을 때 엄청나게 구부러지던 그곳의 나무들. 거센 비바람에 사람들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거리의 나무들은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90도까지 허리를 숙였다. 아무리 열대 야자나무라고 해도 그렇지 신기하리만큼 구부러졌다. 그토록 무섭게 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새벽에 만난 그것들은 또 다른 얼굴을 보였다. 마치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상처 하나 없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지금은 여름도 아니고, 창 밖의 나무들은 앙상하다. 게다가 그곳처럼 열대 나무들도 아니라 뻣뻣하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멋짐을 뽐낸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절개는 없다. 오히려 부는 바람에게 꼿꼿하게 저항하는 것보다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 차가운 그네들이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한다. 어쩌면 이토록 현명한지 참으로 기특하다.
우리가 사는 삶 또한 이렇게 살면 어떨까.
인간이 살아가는데 보통 100년이라고 말을 한다. 어쩌면 그보다 오래 사는 생물들에게는 기껏해야 백 년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100년 보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매일의 미션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수월하게 지나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넘어가지 못할 두꺼운 장벽이 가로막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 앞에서 몇 날 며칠, 또는 몇 년이 지나도록 오고 가도 못한 채 어떻게 넘을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날이 이어진다.
물론 그 벽을 무찌르거나 도구를 이용하여 부서뜨리고 건너갈 수도 있다. 운이 좋으면 조력자를 만나 장벽을 손쉽게 치워주는 행운도 마주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고작 100년 사는 인생이 판타스틱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종족은 홀로 태어나 결국 스스로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장르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매 순간은 본인이 직접 선택해야만 한다.
때로는 굽히지 않는 태도가 그 사람을 지조와 절개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리고 고민해 보아도 부서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좋겠다. 창 밖의 가로수들은 지금 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제 시작된 추운 겨울이 지나 내년의 따뜻한 봄을 만날 때까지 말이다. 아무도 나무들이 겨울 앞에서 무너졌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고 칭찬할 것이고, 새싹이 나면 기특하다고 여길 테다. 예쁘게 꽃이 피면 아름답다 칭송할 테다.
차가운 겨울이 왔다.
매서운 바람이 눈앞을 가로막고, 평균 속도가 나오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자.
비록 지금 사는 삶이 꽉 막혀 답답함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무너지지 말자.
아무리 흔들려도 우리는 나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조금만 버티면 꽃 피울 수 있는, 밝은 태양이 비추는
봄을 금방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