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역사는 오늘부터 일수도...

by 그냥사탕

새벽 6시 정각에 일어났습니다.

그간 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었더랬죠.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분명 알람을 맞춰두었는데 눈 떠보면 7시였고, 전날 육퇴의 기쁨을 누리다 늦잠을 자기도 했어요. 가끔은 6시에 알람 소리를 듣고 성공적으로 눈을 떴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결국 '에라~ 모르겠다!'라며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그래놓고선 '날씨가 추워서, 아직 깜깜해서, 피곤해서'와 같은 다양한 핑계로 행동의 타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진짜 정신을 차린 뒤 남게 되는 찝찝함은 오롯이 제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역경을 헤치고 새벽 6시에 기상했다는 사실이 정말 기분 좋았습니다. 추워도, 깜깜해도, 일어나 양치까지 하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봅니다. 주방에 보이는 시계의 6:12라는 숫자를 마주하니 절로 뿌듯함까지 고개를 듭니다.



사실 예전에 새벽기상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 이틀 성공한 것이 아니었어요. 무려 5년간 지속했었습니다. 그때는 잠귀가 밝은 남편이 혹여 출근에 영향이 끼칠까 하여 알람도 켜지 않았습니다.


새벽 4:30

출발은 아이의 모유수유 때문이었지만 밤중 수유가 끝났어도 자연스레 이어가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일어나 매일 커가는 아이 손을 카메라 타임 앱으로 찍고, 그 당시 활동하던 카페에 인증하며 기록으로 남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 이상하게 온종일 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브런치에 작가로서 글을 쓸 수 있었던 시점이 그즈음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새벽'이 좋아졌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워킹맘에서 주부가 되면서부터 사이가 멀어졌지만 말입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좋은 행동은 습관으로 들이기에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한다 해도 내 것으로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 좋은 습관은 신경 쓰지 않아도 너무 쉽게 몸에 물들어갑니다. 반대로 없애는 데에는 그 이상의 노고가 들어요. 새벽기상은 고작 2~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저한테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익숙하게 해 왔기 때문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과거에는 전날 몇 시에 잠이 들어도 손쉽게 해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자만심에 물든 오만함이었습니다. 최근 다시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다음날부터 계획한 모든 것을 우수한 성과로 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현실은 이상과 달랐어요. 상체를 일으켜 화장실까지 향하는 발걸음을 떼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새벽 6시에 알림을 설정하고서도 말이지요. 그렇기에 이 시간에 글쓰기 노트를 펴는 스스로에게 칭찬 한 바가지를 부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또한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처음 시작했을 당시 조리원에 있었을 때고, 집으로 와서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신생아를 돌보는 일이 참으로 고단했거든요.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그 모든 일을 제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간절함'


아직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이었으나 에너지 넘치는 첫째와 엄마 없으면 끈기 넘치게 계속해서 울어대던 신생아 덕분에 강제 칩거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24시간 함께 있어야만 되는 상황이었지요. 아무리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집순이라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로서 메어있는 건 숨이 막혀왔습니다. 때문에 유일하게 혼자 놀 수 있는 깊은 새벽을 찾았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시작한 작은 일탈은 저에게 살아갈 용기가 아닌 생존할 수 있는 딱 하루치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었습니다.


한 자리에서 꼬물거리던 아이가 활동 반경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 엄마 따라 같이 새벽기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 상황을 피해 점점 더 다른 시간대로 대피했고 10분, 20분씩 빨라지다가 결국 새벽 4시 30분이라는 대단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되고 지금은 어려웠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턱끝까지 밀고 올라오는 간절함. 그때는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이라 여겼습니다. 덕분에 마음 아픈 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깜깜한 오늘의 새벽.

누군가에게는 이미 익숙한 깜깜함 이겠으나 저에게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어색한 어둠입니다. 그때와 같은 이유의 절박함은 아니지만 오늘의 제 앞에는 다른 모양의 간절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학기 중이라 오전에 다른 생각을 할 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방학이 다가오겠지요. 당연하게도 여전히 이런 일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익숙함을 덮어버릴 작은 설렘을 기다립니다. 그저 매일이란 편안함에 속아서 제자리가 아닌 뒷걸음질 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다는 바람이요.


나도 모르게 언젠가 꺾여버린, 그래서 이미 퇴화된 날개에 에너지를 덧바르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고작 며칠 했다고 새로 돋아나지 않는 깃털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침이 주는 희망으로 끊어졌던 날개의 신경회로를 이어주고 밝은 기운에 피가 돌 수 있도록 수혈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어요. 프랭크 보제이즈 감독의 1937년 영화에서 시작되어 유명한 명언처럼 사용되고는 합니다. 그런데 영화 내용과는 달리 저도 이럴 때 한 번 써보고 싶네요.


'나의 역사는 새벽에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받게 되는 24시간입니다. 고작 하루를 성공하고 이렇게까지 허세를 부려도 될까 싶으나 그럼에도 시작이 반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시작은 기분 좋게 반이나 성공했습니다. 그렇기에 모닝 기운을 받아 남은 하루를 희망을 다지는 용도로 성취하려 도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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