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추행죄] 성희롱? 성추행?
1. 내 다리를 대놓고 쳐다본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어느 주말, 미모의 여대생인 나는 오랜만에 예쁜 치마를 입고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오른팔에 끼고 아메리카노의 진한 향기를 흩날리며 도서관에 들어섰다. 2년 전 신입생 때 사 두고 줄곧 라면냄비 받침으로만 쓴 이 책을 오늘은 기필코 읽으리라.
책에 한참 빠져들고 있을때즘 맞은편 약간 먼 자리에 모자를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앉았다. 아까 들어올 때 입구 쪽 자리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남자였다. 그는 핸드폰을 보다 말고 계속해서 내쪽을 쳐다보았다. 신경 쓰이긴 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책을 계속 읽었다. 책을 한참 읽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그 남자가 내 맞은편 더 가까운 자리로 이동해 있었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는 마치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듯 황급히 눈을 피했다.
그때부터 신경이 쓰여 책을 보는 척하며 그 남자를 관찰했다. 그는 분명 내 다리 쪽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다가 내 다리를 쳐다보는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동차 열쇠, 이어폰 케이스, 볼펜 등을 몇 분 간격으로 한 번씩 떨어트린 뒤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내 다리와 치마 속을 보려고 시도했다.
너무 기분이 더럽고 화가 났다. 쌍욕을 퍼부으며 '이기적 유전자'로 머리를 내리칠까 잠깐 망설였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내가 가해자가 될 것 같아 황급히 물건들을 챙겨 도서관에서 나왔다.
2. 도덕과 법의 경계
위 사건을 담백하게 기술하면 '한 남자가 한 여성의 다리를 계속해서 쳐다본' 사건이다. 자기 눈으로 무엇을 쳐다보든 자기 마음이다. 하지만 상대가 더럽고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로 쳐다보는 것도 자기 마음일까? 이 영역을 법이 규율해야 할까? 분명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도덕과 법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위한 규범이다. 그러나 도덕과 법은 다르다. 도덕의 영역에 맡겨두었다가는 위반에 따른 피해가 너무 커지는 영역을 법이 담당하여 더욱 엄하게 규율한다. 도덕은 어기면 비난이 대상이 됨에 그치지만 형법은 어기면 범죄자가 되며 처벌받게 된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범죄이고 어디까지가 범죄가 아닌지 정확히 알아야 가해자를 처벌받게 할 수도,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리는 일을 피할 수도 있다.
3. 성희롱? 성추행?
일상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이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성희롱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나, 성추행은 처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성희롱'이란 성적인 언행으로 상대방에게 성적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신체접촉등 유형력의 행사를 동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아가씨 다리가 아주 매끈하네."라는 발언은 성희롱에 해당할 수 있다. 위와 같은 행위는 듣는 이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할 행위임에 틀림없으나 우리 형법상 성희롱을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남녀고용평등법상 사내징계나 과태료처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형법상 범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반면 '성추행'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인 언동이 신체접촉 등 유형력의 행사를 수반하여 이루어진 경우를 말한다. 성추행은 형법상 범죄이며 처벌의 대상이 되는데 정식 죄명은 강제추행죄이다.
4. 강제추행죄에 해당하려면?
형법 제298조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자'를 처벌한다. 본 죄를 이해하려면 폭행, 협박, 추행이라는 세 단어의 형법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먼저 '폭행'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상대방에게 물리적으로 실력을 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대를 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침을 뱉거나, 폭언을 하거나, 약을 먹이는 행위도 폭행이 될 수 있다.
'협박'이란 공포심을 생기게 할 만한 해악의 고지를 의미한다. 상대방이 듣고 겁을 먹을만한 내용을 말했다면 상대방이 실제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협박에 해당한다.
'추행'이란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설령 행위자 본인은 성적 만족을 목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었더라도 법원이 보기에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낄만한 행위라고 판단되면 추행에 해당한다.
5. 위 남자를 강제추행죄로 처벌할 수 있을까?
위 남자의 행위는 성추행이라는 용어가 제법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강제추행죄에 해당하는지 한번 따져보자.
자신의 다리를 계속해서 대놓고 쳐다보는 행위는 보통의 여성이라면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느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므로 위 행위는 일단 '추행'에는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 사건의 남자가 여대생의 다리를 쳐다본 행위는 위 신체접촉 등 어떠한 유형력의 행사도 동반하지 않으므로 '폭행'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위 남자는 위 여대생에게 공포심을 느낄만한 말을 하거나 글을 전달한 일도 없으므로 '협박'을 한 것도 아니다.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추행을 해야만 성립하는 죄이므로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은 위 남자를 강제추행죄로 처벌할 수 없다.
6. 다른 범죄로 처벌할 수 있을까?
위 여대생은 자신의 다리를 계속해서 쳐다본 위 남성의 행위로 인해 적지 않은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형법에 '쳐다보기만 한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 남성의 행위는 형법상 범죄가 아니다.
만일 위 남자의 행위가 심한 욕설을 동반했다면 모욕죄가, 명예훼손적 발언을 동반했다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만일 위 남자가 위 여대생을 따라다녔거나 집 앞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킹행위를 하였고, 스토킹 행위가 지속적·반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사건 다리를 쳐다본 행위가 스토킹행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스토킹처벌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 남자의 경우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
7. 왜 처벌 안 하나?
위 남성의 행위는 분명 문제가 있으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처벌받지 않는 것일까? 잠시만 분노를 억누르고 입법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법은 필요악이므로 최소한의 규율이어야 한다. 특히 형벌이라는 중한 제재를 동반하는 형법을 제정할 때에는 더욱 그래야 한다. 벌금이든 징역이든 형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강하게 제한하기 때문이다.
형법이 만일 범죄자만을 귀신같이 알아내 그들의 기본권만을 제한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형법이 제정되는 순간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기본권이 제한된다. 범죄의 고의가 전혀 없는 선량한 시민일지라도 혹시 자기도 모르게 처벌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하게 될까 봐 눈치를 보게 되고 그만큼 행동의 자유가 제한된다.
'다른 사람의 신체를 계속하서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의 일상이 지금과 동일할 수 있을까? 분명 매사에 자신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체 어디까지가 노골적인 것이고 대체 몇 분을 쳐다봐야 계속적인 것인가?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의 입장에서도, 법을 따라야 하는 수범자의 입장에서도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의 시선은 자연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한다. 또한 사진과는 달리 연속적이며 그 인식의 대상이 매우 빠르게 변한다. 따라서 법으로 허용되는 시선의 범위를 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정한다 하더라도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게 될 여지가 있다. 만일 쳐다보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생긴다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해 나중에는 처벌이 무서워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게 되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위 남자가 처벌받지 않는 것은 이 남자가 잘못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법상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8. 마치며
형법상 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의 신체 부위를 노골적, 지속적으로 쳐다보는 행위는 사회상규상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매너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가한다.
남녀불문하고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특정 신체부위를 계속 쳐다본다고 상상해 보자. 일반적으로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상대가 성적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기분이 더러워진다. 상대방의 기분이 더러워질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 매너이다.
이러한 비난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기 눈으로 자기가 보는데 뭐가 잘못된 거냐고. 그러나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분이 상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자유를 제한당한다. 원하는 옷도 자유롭게 못 입고, 원하는 장소도 자유롭게 못 가고, 수치심이나 공포심으로 인해 생활전반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즉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쳐다보지 못함으로써 감수해야 할 자유의 제한보다 당하는 사람이 입게 될 피해의 정도가 훨씬 크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무언가를 자유롭게 보면 될 일이다.
어쨌든 현실이 이러하다. 자신의 신체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다른 범죄행위와 결합되지 않는 한 가해자를 처벌하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우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당장 자리를 뜨자. 계속 있어봐야 기분만 더 상하고 상대의 가해행위를 허용하는 꼴이 된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추가적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하자.
피해자에게 조심하라니 너무 억울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법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내가 스스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 가해자 처벌도 좋지만 추가적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학생들에게 알리거나 학교 게시판에 올려 추가 피해를 막고 공동체 차원의 제재를 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단, 공익적 차원에서 진실만을 왜곡 없이 알려야 명예훼손죄의 성립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