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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26. 2019

조상들이 치킨 나라

대한치킨만세

퇴근길 버스를 타고 가다가 '조상들이 치킨 나라 -' 로 시작되는 버스 광고를 보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저렇게 근엄한 3.1절 광고문구 혹은 애국심 고취 문구에 치킨이 웬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조상들이 지킨 나라' 였던 것 같다. 아 그럼 그렇지. 대한민국 공직사회가 그 정도로 언어유희에 집중할 이유는 없지. 헛것을 다 본 스스로에 헛웃음이 났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치킨환각에 시달린 이유는 월말이라 업무가 몰려 피곤했던 탓이다.


피곤과 스트레스와 치킨의 조합은 그냥 치킨으로 귀결되었다. 퇴근길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무아지경이 된 채 이미 배달앱으로 치킨을 시키고 있었다. 치킨 제자백가시대라 할 만큼 많은 브랜드가 있기 때문에 치킨 브랜드의 선택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치킨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저녁의 질이 달라진다. 체인점을 선택할 것인가 동네 강자를 선택할 것인가. 달콤인가 매콤인가. 치킨은 강하고, 치킨은 모든 것을 이기므로 다이어트에 대한 결심 같은 것은 무용지물이다. 녹초가 된 퇴근길에 하이힐을 신고 걷는 것은 늘 고문같지만 치킨을 먹고 싶다는 강한 의지로 인해 발걸음에는 잔뜩 힘이 실렸다.



집에 도착해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치킨배달 아저씨를 기다렸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치킨배달 아저씨를 가려낼 수 있다. 미세한 비닐봉지 소리가 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이럴 때를 대비한 각종 앙념가루를 미리 준비한다. 최근의 경험으로 인해 양념치킨에 양파가루나 마늘가루를 조금 뿌리면 감칠맛이 더해지고, 커큐민이나 카레가루를 뿌리면 카레양념치킨맛이 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KBS 다큐멘터리 <요리인류>를 감명깊게 시청하며 습득했던 향신료에 대한 모든 경험과 정보는 치킨을 먹는 데 쓰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작 치킨먹는 데에 이 데이터를 활용하다니, 하고 애석해한다면 오산이다. 결국 먹고 살자고 공부도 하고 경제활동도 하는데 이왕 먹고 살거라면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살면 좋은 것 아닌가. 약간의 양념과 향신료는 치킨 한마리로 여러가지 맛을 즐길 수 있게 해 주니 요리 뿐 아니라 삶에도 풍미를 더해준다. 치킨은 어지간한 양념가루나 허브와 모두 궁합이 괜찮으므로 향신료의 효능을 시험해 보기에도 좋다. 배워서 남도 주는데 배워서 치킨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면 실사구시의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얼마 전 상사의 막말로 인해 회사에서 눈물을 쏟아서 계속 울적해 있었다. 회사에서 우는 것만큼 세상 못난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정말 이번엔 해도 너무했다. 자괴감과 우울감, 수면부족과 속쓰림, 두통과 목의 이물감 등의 모든 증상은 치킨으로 해결되었다. 치킨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 2015년 한 빅데이터 연구팀은 SNS상의 데이터를 분석해 '치킨' 에 대한 언급 빈도와 행복의 상관관계를 분석하여 '치킨지수'라는 것을 수치화해 증명한 것이다. 치킨이 의학적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치킨의 심리적 안정과 위안 효과를 전국민이 체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저 퇴근길 버스광고를 잘못 보았을 뿐인데... 어쨌거나 3.1절 100 주년 만세, 대한치킨만세.

최현석 셰프님도 인정하신 치킨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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