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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Feb 06. 2021

승진, 행복불감증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내는 것일 아닐까....... 스튜 냄비의 밑바닥처럼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말이다.
- 권지예, <뱀장어 스튜>


승진을 했다. 우리 회사는 연초에 딱 한 번 승진 인사를 발표한다. 주로 설 연휴 직전에 발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설이 2월인 올해는 1월 마지막 출근일인 1월 29일 발표를 했다. 승진 인사 발표 전자문서에 드디어, 내 이름 세 글자가 있었다. 당일 아침 인트라넷에 승진 발표 예고가 공지되었기에 마음은 오후 네 시쯤부터 게시판을 새로고침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월말이고 요즘은 한창 바쁜 시기라 일하기에도 정신이 없어서 사내 공지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발빠른 주위 사람들이 먼저 내 이름을 확인하고 축하를 보내 주는 바람에 알 수 있었다.


너무 간절히 바랐던 승진이기에, 너무 힘들었던 2020년이었기에, 하늘을 날 듯 기쁠 줄 알았는데 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감정을 묘사하자면 그것은 기쁨보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아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올해도 슬프거나 부끄럽거나 우울할 줄 알았는데, 그 후폭풍이 또 몇 달 나를 잠식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힘을 북돋아 주는 소식을 듣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삶이나 일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뚜렷하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실질적인 변화가 없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급수가 오르고, 직책과 직무가 조금은 달라지고, 질문을 하기보다는 받게될 것이다. 연봉이 어느 정도는 오를 것이고, 오른 연봉 이상의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질 것이다. 대외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책임과 책무가 더 무겁게 전달될 것이고, 누군가가 나의 보호막이 되어주는 대신 내가 누군가의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모든 일에 대해-독단적이라는 말이 아니다-스스로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쁘다, 신난다, 가 아닌 다행이다- 라는 감정. 나이에 비례하여 희노애락의 감정에 대한 역치도 점점 높아져서인지, 이제 여간해서는 감정에 휘둘리기가 쉽지 않다. 기쁨을 크게 느끼지 않는 만큼, 슬픔도 오래 가지 않는다. 이러한 초연함은 주로 분노나 비애와 같은 부정적 감정보다는, 기쁨과 행복과 같이 긍정적 감정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된다. 인생의 목적이란 누구나 행복한 삶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행복불감증에 걸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감정에 대한 불감자나 불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와 경륜이 생긴 것이라 여기고 싶다. 인생의 중반부에 이른 연륜이자 경험의 산물인 것이라고. 반올림하면 마흔, 불혹을 앞둔 나이가 되었으니 그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마음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일 테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내 감정을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할 테니까.


내 걱정 또한 기우였다. 뛸 듯이 기쁘지 않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날수록 나는 조금씩, 조심스럽게 행복해졌다. 이런 시국에 직장이 있는 것도 감사한데 승진을 해서 더더욱 감사했다.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는 사무실에 덩그러니 출근해서 야근을 하다가 밤 열 시에 느닷없이 사무실 불이 소등되어도 괜찮았다. 나의 행복은 20대의 직화구이같은 열정이 아니라, 뚝배기같고 곰탕같은 우직함과 묵묵함으로 발현되는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지 않아도, 이 정도의 화력으로 꾸준하게 계속 타오를 것이다. 때로는 열을 내고, 때로는 열을 식히기도 하며 은근하고 한결같게.


아마 나는 제법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다가 그제서야 문득 알게 되었다. 다행이다, 라는 것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삶에 대한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그 말 속에 있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있어 다행이고, 출근할 직장이 있어 다행이고, 가족들이 무탈하여 다행이다. 다행스러운 일이 많은 삶은 그래서 행복한 삶인 것이다.

참, 다행이다.


중요한 점은, 뱀장어 스튜를 만들려면 불이 세지 않아야 한다.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력이어야 한다.
- 권지예, <뱀장어 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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