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이 되어 시작하는 연애는 젊을 때만큼 고속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어릴 때의 연애가 직화구이처럼 활활 불타오른다면 이 나이의 연애는 뚝배기처럼 사골국처럼 뭉근하고 은근하게, 그러나 깊게 뜨거워진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어느 정도의 사회 경험도, 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도, 어느 정도의 연륜도 쌓인 상태. 그렇기에 더욱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상태. 첫인상이나 느낌만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려 든다.
나이가 들수록 사고의 폭도 유연해지고 인간관계도 넓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사고는 경직되고 인간관계는 한정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설렘보다는 긴장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두렵다. 이 나이에 사람을 만날 때의 두려움은 모두 비슷하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이 사람이 과거에 방탕하거나 방종한 삶을 보냈으면 어쩌지. 혹은 내가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유일한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불안과 불신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고 딱히 더 좋을 것도 없다. 그는 살아오며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불타는 사랑을 했을 수도 있다. 젊은 나이에 그런 경험조차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러나 그 모든 시간들이 퇴적되어 지금 내 앞에 이 사람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서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 줄 것이다.
같은 시간을 걸어가며 우리는 더 끈끈해지고 공고해지고 애틋해질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감정은 더 깊어질 일만 남았기에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함께 할 날이 우리가 살아온 날보다 더 많기를, 그리고 그 날들 속에서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그래서 우리는 늘 앞날이 바쁘다. 과거를 걱정할 시간이 아깝다. 가끔 “어릴 때 공부 좀 더 할 걸.” 하고 한탄하는 나에게 남편은 말한다. “앞으로 잘 살 생각이나 합시다.” 그 말이 맞다. 함께 앞날을 이야기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과거를 덮고 현재를 빛나게 할 만큼 아늑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