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은 없지만 사는 데는 꽤 도움이 됩니다
MBTI를 크게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 경험상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너무 상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많이 본 탓이다. 그러나 성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든 지속적인 것이든, 상대적인 것이든 절대적인 것이든.
사고와 감정을 나타내는 T(사고)와 F(감정)에 있어서, 나는 F가 우세하다. 반면 남편은 T가 우세하다. 아주 많이. 물론 나도 T의 성향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라, 나보다 더 감정형의 사람을 만나면 나는 급 사고형의 사람으로 바뀐다. 그런데 남편과 나는 그냥 극한 T와 F다. 그러다 보니 남편에게 공감이나 위로를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직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직한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전 회사는 이랬는데 이 회사는 이렇다, 이해할 수가 없다, 좀 더 자율적이고 복지 좋은 외국계로 다시 이직해야지 어쩌고 저쩌고. 남편은 듣다가 말했다.
“전 회사가 좋았던 건데, 그 회사를 때려치고 나온 것도 본인 선택이었잖아. 대부분의 한국 회사가 다 지금 회사같아. 남들 다 그렇게 살고 있어. 그리고 본인 능력이 그거밖에 안돼서 그거밖에 안되는 회사를 간 거면 현실을 받아들여.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으면 간 다음 얘기해. 내가봤을때 냉정하게 2-3년 내에는 가능성이 높지 않아. 가려고 해도 여기서 충분히 경력 쌓고 나가야지.“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아니 구구절절 다 맞는말이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 팩트폭격인건 아는데, 내가 그게 팩트인걸 몰라서 말한 게 아니다. 나는 아 그래, 회사 힘들구나, 나쁜 회사 같으니라고! 하는 ’공감‘과, 그래 꼭 좋은데로 다시 이직하자, 기회가 올거야, 라는 ’위로‘를 바란 거란 말이다.
임신 10주차쯤 되었을 때 남편과 지하철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날 얼마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임산부석을 양보해 주지 않는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임산부 뱃지를 보고 나와 눈이 마주쳐도 계속 앉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선별로는 1호선이 제일 심하다. 난 1호선이 정말 싫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7호선 지하철을 탔는데 공교롭게도 임산부석 두 곳에 모두 20-30대쯤 되는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임산부 뱃지를 보고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 사람들 부인이나 딸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내가 씩씩대며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번에도 혼자 평온했다.
“저기 앉아야 할 만큼 힘든가보지. 그리고 임산부석 안비워준다고 처벌을 받거나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잖아. 양심에 맡겨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냥 자기가 참아.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닐텐데 그 때마다 스트레스 받으면 자기만 힘들어. 뱃속에 아기한테도 안좋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몇 정거장만 참아.“
역시 틀린말은 아니다. 나는 7 정거장만 가면 됐으니까. 화를 내며 가면 아주 긴 7 정거장이지만, 그러려니 하고 핸드폰을 보며 가면 그럭저럭 참을만한 7 정거장이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나와 함께 임산부석에 앉아있는 남자들을 비난해 주기를 원했던 거다. 맞는말 대잔치를 바란 게 아니라고!
속이 터지지만 사실 남편의 이런 ‘팩폭’은 꽤나 도움이 된다. 웬만한 일에는 공감보다 솔루션을 주는 남편의 ‘화성남자’같은 행동이 ‘금성여자’ 부인에게는 현실감각을 일깨워주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해 준다. 그리고 남편은 나에게만 이런 게 아니라 자기 부모님께도 똑같다. 아니, 부모님께는 한술 더 뜨는 것 같다. 그래서 냉정한 아들 대신 시아버님 넋두리도 잘 들어드리고 맞장구도 잘 쳐드리는 며느리는 점수를 딸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아이는 남편의 성향을 좀 닮았으면 하기도 한다. 공감능력이 너무 없어도 문제지만, 매사 공감능력이 너무 뛰어나도 살기 힘들다. 세상 모든 일에 감정이입을 하다 보면 정작 내 일은 하기 힘든 법이다.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도 T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꽤나 자주 사랑한다고 하고 부인 최고라고 해주는 걸 보면 T 남편과 사는 것도 제법 할만한 일이다. 그건 빈말이 아닐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