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한 지 이제 세 달이 다 돼가는데, 아직도 일요일 밤 아기 어린이집 이불을 빠는 시간이 가장 착잡하다. 주말 내 엄마와 붙어 있던 아기는 월요일 아침이면 엄마가 출근해야 한다는 것을 그새 잊어버렸는지 섧게 운다. 내지르는 울음도 아니고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다. 20개월 아기의 생각에도 자신의 오열로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체념과 적응의 그 어딘가에서 아기는 벌써 너무 일찍 세상에 대한 열패감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는 생계형 직장인 엄마는 아기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뒤로한 채 무거운 출근길을 나선다.
월요일이면 그래서 유난히 아기가 걱정이 되고, 그 사실을 알기에 일요일 밤부터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워킹맘으로 사는 것은 바쁘고 고단하지만, 한편 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게 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구간에서 지금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을 해내오고 있다. 물론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완벽한 엄마, 완벽한 주부, 완벽한 커리어우먼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버렸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사력을 다해 온몸의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완벽함의 고지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하는 일이란 건 이렇다. 그저 나는 아기가 잠든 후 설거지와 빨래와 정리와 다음날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겨놓고 1시쯤 잠이 들어서는 중간에 아기가 깨면 계속 토닥토닥하며 같이 잘 뿐이다. 그저 엄마 아니면 안 되는 아기가 새벽 두세 시쯤 깨서 엄마를 찾으면 안방에서 아기방으로 달려가 우유를 먹이고 재우고 같이 잠들 뿐이다. 아기는 때로는 한번만 깨기도 하고 때로는 서너 번을 깨거나 아예 일어나 한두 시간을 놀다 자기도 한다. 그저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도 6시 반에 일어나 새벽배송 온 신선식품을 챙기고 출근준비를 하고 출근하며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버리고 8시까지 출근을 하고 3시에 퇴근을 하고 4시에 아이를 하원시키고 놀이터에 가서 놀아줄 뿐이다.
그저 이 뿐인데 나는 복직하자마자 코로나에 걸렸고 갑상선기능저하 수치는 점점 더 낮아지고 만성 수면부족과 어지러움에 시달린다. 나라는 사람의 한계란 고작 이것뿐이었나 보다. 가끔은 전업주부 엄마들이 부럽기도 하고, 가끔은 매일 시터나 가사도우미가 오는 엄마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삶은 그런 옵션이 들어가 있는 삶이 아니었다.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게 몸으로 얼마나 힘들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알았던들 팔자라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다 깨서 엄마를 찾는 아기가 엄마의 목소리 한 번에, 손길 한 번에 바로 새근새근 잠들 때,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계속 엄마의 옷이며 몸을 만지작거리는 그 작은 손과 안도감에 취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가끔 엄마를 부르며 자다가 거실로 아장아장 걸어나온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만족스럽게 다시 잠들 때, 온 우주를 지배하는 능력자가 된 것만 같다. 엄마의 별것 아닌 말에도 까르르 웃으며 행복해하는 아기를 볼 때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내 품에 안긴 아기를 볼 때면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예쁜 아기의
엄마가 된 걸까 감사하다. 엄마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아기. 엄마는 아기의 세상이자 우주인 것이다.
아직도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신기하다. 아직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부터 찾는 내가 엄마라니. 벌써부터 무슨 일만 생기면 엄마를 찾는 내 아기를 보면 그건 선험적인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리라. 엄마엄마, 입에 붙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몇 시간 후면 월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