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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30. 2018

대부 (the GodFather)

인간 세계의 신 vs. 신 앞의 인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없이 '대부'를 꼽는다. 여자가 대부를 좋아하는 것은 처음 봤다며 놀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이런 아재 개그를...) 많은 사람들에게 <대부>를 추천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접근은 문학으로 치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쯤에 해당하는 것 같다. 접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유쾌하지 않고 BGM은 더더욱 고색창연하다. 상영시간도 길고,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영어는 귀에 거슬리며, 오락적이거나 유희적인 요소도 거의 없다. 심지어 3편이나 된다.

'시간=돈'인 현대인들에게 3편을 모두 보라고 하면 지레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편과 3편의 마지막 20여분씩이라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전편을 보면 당연히 좋겠지만, 이 영화는 1, 2, 3 편 모두 묵직한 여운이 남는 엔딩이 일품이다. 특히 1편과 3편의 엔딩은 서로 화답하듯 인간사의 명암과 진리를 대변한다. 분명 무겁고 음울한 영화인데 이상하게 우울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저 고개가 끄덕여질 뿐이다. 생명은 존엄하고 살인은 비난받아야 마땅함을 현대 문명은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시종일관 생명의 희생이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 콜레오네 일가의 범법행위는 정당화될 수는 없으나  묘한 이해심이 들게 한다.

"I Do"


<대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것은 역시 1편의 엔딩이다. 1편의 마지막 20여 분은 "I do" 로 요약하고 싶다. 세례식 장면을 배경으로 조직을 위협하는 인사 숙청이 거행되는 장면이 계속 교차된다. 아마도 계유정난의 밤 세조(수양대군)의 살생부가 실행되는 과정이 이와 같았을까. 이탈리아 혈통인 콜레오네 일가의 종교는 역시 가톨릭이다. 마피아계의 대부 마이클 콜리오네는 아기의 대부로서 신 앞에 서약한다. 초점 없는 눈과 감정 없는 눈빛을 제 것처럼 담아내는 알파치노는 음울한 제왕적 아우라를 뿜어낸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이 대체불가한 명배우인지를 증명한다.

그는 가장 성스러운 세계의 대부가 됨과 동시에 가장 세속적이고 악한 세계의 대부가 된다. 한쪽에서 영생을 얻을 때 한쪽에서는 이승의 생을 마감한다. 한쪽에서는 포대기가 벗겨질 때 한쪽에서는 이발소의 커트보가 벗겨진다. 한쪽에서 성당의 오르간이 울릴 때 한쪽에서는 총성이 울린다. 한쪽에서는 성수가 흐르고 한쪽에서는 피가 흐른다. 한쪽에서는 천상에 있는 절대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한쪽에서는 지하세계의 암투에서 이긴 지배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매형의 죽음을 사주하고도 냉정히 누나를 맞이하는 대부. 오열하는 누나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과 무관함을 이야기하는 대부. 달라진 남편의 모습을 눈치챈 아내 앞에서 담담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대부. 감정도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 텅 빈 눈빛이 화면 밖으로도 선연히 전해져 더욱 서늘한 기분이 든다.

패밀리(조직)를 위해 냉혈한 대부가 되었으나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는 끝까지 무고한 가장이고 싶었을 그. Godfather 이기 이전에 그저 한 인간이고 한 남자일 뿐이나, godfather 로서의 책임과 조직의 위계를 위해서는 말랑한 감성은 접어두어야 하기에.
한 사람이 이 모든 짐을 질 수 있는가.
한 사람이 이 모든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마이클은 간단히 답한다.
I do.



인간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그러나 <대부>시리즈의 마지막인 3편의 엔딩은 "I do"에 대한 대가를 무정할 만큼 명시적으로 요약해 준다. 간단하게는 세 여인의 죽음으로 답을 보여준다. <대부>의 3편과 세 여인은 숫자 '3' 의 공통분모로 묘하게 삼위일체의 신을 연상시킨다.


 세 여인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또 그를 가장 사랑했던 여인들이나 결국 모두 그를 떠난다. 그는 여인들이 떠나는 장면을 모두 생생히 목도한다.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진 마이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업보이며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암흑가에서 축적한 재산을 양지로 끌어올려 합법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은 마이클. 이제 남부끄러울 것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의 손에 묻은 피는 씻겨지지 않는다. 피의 대가는 피로 치르게 되며, 생명의 대가는 생명으로 치르게 된다. 지난날의 허물과 과오는 돈으로 덮을 수 있다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의 수레바퀴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 동안 쌓은 죄의 대가로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형벌을 받는다. 희생당하거나 등을 돌리며, 또 눈 앞에서 총을 맞으며 떠나는 이들 앞에 그의 모든 권능은 속수무책이다.


<대부>의 대단원의 막은 허망하리만치 쓸쓸하다. 임종을 앞둔 노인이 된 마이클은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의자에 앉아 있다가 고개가 꺾인다.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모든 것을 가졌던 암흑가의 제왕이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모습은 그가 쌓아올린 죄의 탑 앞에 참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 앞에 겸허히 고개 숙인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잃은 허무함이 그를 조용히 감싸고 있다.


흙에서 태어난 자 흙으로 돌아간다. 생명은 홀로 이승에 왔던 것처럼 홀로 저승으로 간다. 부귀영화를 거머쥐었더라도 생의 마지막은 결국 혼자였다. 이토록 쓸쓸하고 초라한 죽음이라니. 그가 이루었던 재물과 권력은 마지막 순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생이 다 하는 순간 그에게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제 먼저 세상을 떠난 여인들 곁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리라.



인간 세계의 신 vs. 신 앞의 인간


<대부>는 수많은 명대사의 집합체이기도 하며 인생의 진리를 투박하게 보여주는 질그릇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대부> (the GodFather) 는 결국 인간 세계에서는 '패밀리'의 godfather로 존재했으나, 신 앞에서는 죄인이었을 뿐인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제왕적 인간이 존재할 때 권력과 금권에 기생하는 군상의 다양한 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힘과 돈 앞에 태생과 지위와 직종을 떠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뉴욕의 역사를 그린 것 같지만 모든 대도시와 모든 사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고찰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준엄한 메시지다.


인간의 세계에서 신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의 "I do"는 3편의 인생무상과 맞물리면서 대조를 이룬다. 사람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덧없이 스러질 수 있는지가 모두 담겨있다. 인간사의 모든 흥망성쇠는 이 축소판 안에서 돌아간다.
매년 쏟아지는 훌륭한 영화들 속에서도 이 영화가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이런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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