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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pr 08. 2018

텍스트포비아

글을 읽지 않는 시대다.


갓 입사했던 시절, 당산역이나 영등포구청 역에서 삼성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출근길 2호선은 아귀처럼 사람들을 계속 집어삼켰다. 제한된 철제 칸 안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눌러담을 수 있는 걸까 신기할 정도였다.


인파는 신림-봉천-낙성대를 지나며 정점을 찍었다. 지하철은 숨을 참았다가 한꺼번에 내쉬듯 교대-강남-역삼에서 사람들을 토해냈다. 여름에는 진득한 살갗이 서로 닿아 불쾌하고 겨울에는 옷 두께만치의 공간을 손해보는 느낌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우산의 물기가 옷이며 다리에 닿기도 하고 어깨나 얼굴까지 튀기도 하여 불쾌한 습기를 온몸으로 체감해야 했다.


계절과 날씨를 막론하고 삼성역에 이르면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지하철의 공기를 함께 호흡하고 나면 정체불명의 어지럼증이 도졌다. 뇌에 신선한 산소공급이 절실했다. 서류가방이며 핸드백에 치이고 종아리가 굳은 채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며 밥벌이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깟 출근길 때문에 아침마다 삶을 재고하고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찰했다. 제법 철학적인 고민은 주말이면 까맣게 잊혀졌다가 월요일이면 되살아났다.


종류별로 하나씩 챙겨도 너무 금방 읽어버렸던.

그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탑승역에서 악착같이 메트로(지하철 무가지)를 챙겼다. 여러 종류의 무가지 중 가장 인기있는 신문이어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메트로는 동난 뒤였다. 물론 책을 읽기도 핬다. 그러나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마저 버거울 때가 있기에 지하철 무가지가 더 자주 선택되었다. 종류별로 무가지를 챙겨 탔다가 좌석 위 짐칸에 두고 내리기도 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무가지도 쌓여 있었다. 몇 정거장 지날 무렵이면 인파 가득한 지하철을 헤집고 폐지 수거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루를 끌며 지나갔다. 지하철 좌석 가운데께로 밀려오면 출입문까지 가기도 버거워 간혹 하차역을 지나치는 사람이 생길 정도의 밀도였다. 그런데 폐지 수집가들은 그 인파를 자루까지 들고 뚫으니 정녕 대단한 기술이라고 할 밖에는.


그러나 이제 메트로를 본 지도 오래다. 그 많던 지하철 무가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모두는 작고 납작한 사각의 기계에 눈길을 주고 있다.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기 멋쩍어서, 창밖을 구경할 수도 없는 지하철에서 시선을 어디 둘 줄 몰라서, 어제 놓친 오락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막간을 이용해 동영상 강의를 듣기 위해서, 이동중에도 피할 수 없는 업무의 연속을 위하여, 시도때도 없이 생각나는 소중한 이와 대화하기 위하여. 제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에 고정되는 눈길.


책이나 종이 신문이나 길이가 제법 긴 글들을 읽을 때는 텍스트를 눈으로 좇으며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다. 행간의 의미와 신문의 논조와 저자의 의도를 추측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자리를 대체한 핸드폰 동영상은 단순하고 가볍다. 씹지 않고 꿀꺽 삼켜도 되는 군것질거리마냥 말랑말랑하고 달콤하다. 이미 지쳐있는 한 주의 후반에도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긴 글을 읽는 것이 귀찮아졌다. 읽기도 전부터 그 길이에 압도당해 이미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해석은 최대한 덜 요구하고, 유희는 최대한 많이 주는 다른 수단을 찾고 있었다.

종이신문은 이런 기능도 있는데...


그렇게 점점 글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뉴스는 제목만 보고, 눈길은 사진에만 꽂힌다. 별 관심 없는 인터넷 기사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연예인 사진을 의미 없이 클릭할 때도 많다. 그렇게라도 해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 보고 있지 않으면 너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아서 괜스레 화면을 들여다 본다. 실상 그다지 중차대한 일도 없으면서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골몰한 척을 한다.


그러나 이제 다시 글을 읽고 싶다. 외부 세계의 소식이 아닌 나 자신에게 몰입하던 순간이 그립다.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근황에서 벗어나 나의 내면과 마주하고 싶다. 매체는 바뀌더라도, 꼭 장문이 아니더라도, 문자의 세계에서 사유를 펼치던 사람이 되고 싶다. 텍스트포비아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 다음 차례는 사유 포비아로 이어질 것만 같아서.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되지 않도록, 꿀꺽 넘어가는 정보보다는 조금 더 씹어 삼켜야 하는 지식을 가까이 해야겠다. 도정되지 않은 현미밥처럼 좀 더 꺼끌꺼끌하고 많은 사고의 저작작용을 요구하는 컨텐츠를 피하지 말아야겠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 않았던가. 존재가 위협받지 않기 위해 생각을 하고, 생각이 위협받지 않기 위해 내 나름의 수단인 텍스트로 회귀해야겠다.


그런데 오랜만에 책을 펼치니 역시 졸립다. 졸립지 않게 일단 미드나 한 편 보고... 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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