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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r 26. 2018

미세먼지 빅픽처

10년차 직장인은 굳이 모닝콜이나 알람의 도움이 없어도 6시면 잠에서 깬다. 출근은 9시까지이므로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났다고 해서 일찍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월요일은 늘 괜히 미적대다가 지각하지 않는 마지노선이 임박해서야 집을 나선다. 주말이 언제 지나갔는지 믿기지 않는 아침은 매주 반복된다. 사실 다른 요일이라고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출근하기가 유난히 싫었던 것은 월요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세먼지와 스모그의 굳건한 결합으로 더더욱 뿌연 대기 탓이다. 미세먼지는 대놓고 '매우 나쁨'이었다. 초미세먼지와 통합대기 수치도 모두 빨간불이었다. 이 모든 악성 요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머물렀다. 견우직녀도 아니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닌데 저토록 공기중에 부둥켜 안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마룻바닥에 뒹굴던 머리카락 뭉치에 먼지가 달라붙은 덩어리를 보는 듯한 불쾌감이 온 몸을 감쌌다.


창 밖을 보니 생존이 위협받는 기분이다. 공기로 흡입하는 사약이 대기권에 뿌려진 듯했다. 사약을 받고 켁켁대며 몸을 뒤틀다 쓰러지는 대역죄인처럼 저 공기를 마시면 나도 이내 앞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다. 북핵보다 미세먼지가 더 위험하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무기는 소지하고 있다 하여도 발사되지 않으면 그만이나 미세먼지와 황사와 스모그는 수시로 대량 살포된다. 어떤 생화학 무기보다 위험한 무차별적 유입이 가능하다.


범인을 색출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에 부딪쳤다. 거대한 대륙을 주범으로 지적하지만 어느 지도자도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믿었던 자도 믿지 못했던 자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열차 안의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며 줄곧 '밸런스'를 강조하던 열차의 설계자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와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 분)가 생각났다. 어쩌면 저 나라는 자국과 우리나라의 인구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독가스를 살포하는 것은 아닐까. 적자생존을 위해 이 유독물질에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도태시켜 버리고 생존력 강한 유전체만을 남겨 인구를 유지하려는 것은 아닐까. 무의미한 음모론을 상상했다. 그러기에는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너무 낮은데, 라고 변명까지 해 가며.

강대국에 낀 우리나라를 보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고래가 싸우지않아도 새우는 저절로 압사한다. 새우는 나날이 숨이 막힌다. 한 쪽에서는 방사능을, 다른 한 쪽에서는 대기오염을 선사한다. 배경에는 대자연의 '빅픽처'가 엄숙히 깔려 있다. 우리는 무력함을 공유한다. 미세먼지 마스크는 미세먼지의 거대한 장막 앞에 너무 연약해 보인다. 망망대해의 나뭇잎 배처럼 이내 묻혀버릴 것 같다. 우주복에 필터가 달린 헬맷 정도는 써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의 패션은 어쩌면 거대한 공기정화 투명구를 하나씩 머리에 쓰고 우주복 같은 소재의 미세먼지 방지 옷을 입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히잡을 쓰는 아랍의 여인들처럼 남녀노소 구분 없이 헬맷을 써야 할 수도 있다. 샤넬 헬맷과 에르메스 헬맷 같은 것이 부의 상징이 될 날도 머잖은 것 아닐까. 젊은이들은 여기에 그래피티를 그리기도 하고 튜닝을 하기도 하고 악세서리를 달기도 하겠지. 필터의 성능은 공기의 질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므로 부유층은 더 고성능의 작고 조용한 필터를 달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서는 공기정화헬맷 보조금을 지급해 줄까. 혹은 면세 혜택을 주려나.

더 큰 문제점은 신체를 감싸는 불편함이 아니라 정서의 차단일 것이다. 그 시대에는 미세한 체온의 교환이나 손끝이 스칠 때의 미묘한 떨림, 설레는 저릿함 같은 감정은 어떻게 전달하려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에서 풍기는 은은한 샴푸 냄새라던가 핸드크림 향인지 비누 향인지 모를 싱그러운 향내음과 살내음은 어떻게 느끼려나. 거추장스러운 보호복을 벗고 팔짱을 끼고 혹은 손을 꼭 맞잡고 다닐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할 텐데. 떨리는 심장 박동과 발그레하게 상기된 양 볼을 애써 감추려는 노력이 화석과 같이 먼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될텐데.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데이트 장소나 놀이시설이나 운동장은 모두 실내로 이동시켜야 하겠지. 겨울 외투를 맡겨 놓듯 공기정화복을 라커같은 곳에 보관하고 돌아다녀야 할 터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은 뚜렷한 사계가 있어 즐겁기도 하지만 계절에 따른 옷과 신발을 따로 구비해야 하니 버겁기도 하다 생각했다. 거기에 보호복까지 구입해야 한다면 경제적인 부담은 더 늘어날텐데. 만약 그 거대한 실내의 공기정화장치가 고장 나기라도 한다면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이 상황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되어 있을까. 괜한 걱정이다. 당장 오늘이 급한 직장인은 일단 일부터 해야겠다.


오늘 공기가 나쁘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도 어차피 나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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