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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y 22. 2018

신은 있는가

Quo Vadis vs. Dona Nobis Pacem


왜 갑자기 그 날 옆동네 성당을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무엇인가 용건이 있어서 그 근처에 들렀다가 시간이 맞아서 미사에 참례했던 것 같다. 신과 종교에 대한 회의를 버릴 수 없지만 종교 생활을 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바람도 버릴 수 없었다.
일요일 저녁, 청년들을 위한 미사였다. 앳된 얼굴의 신부님은 아직 소년티가 났다. 그 날 미사에서 신부님은 청년부 학생이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날 아침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그 학생이 얼마나 바르고 신실했는지, 얼마나 밝고 모범적이었는지를 이야기하던 신부님은 결국 눈물을 쏟았다.


"가끔 사람들에 저에게 물어요. 신부님, 하느님은 정말 계세요?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여러분, 사제니까 제가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죠? 신에 대한 의심은 여러분만 하는 게 아니라 저도 가끔 합니다. ... "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신부님의 모습은 인간적이고 애틋했다. 신을 의심하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이나 믿기 힘든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보다 더욱 절절했다. 신을 부정할 수 없는 사제로서의 소명과 신에 대한 원망 사이를 오가는 젊은 성직자의 번민과 고뇌가 그 눈물 속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신에게 평생을 바치기로 서원한 사람, 신의 대리자이자 신과의 매개자인 사제조차 이런 존재론적 의문을 한다는 사실은 사제의 권위로서 할 수 있는 어떤 강론보다 더 큰 위로였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 아무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상선벌악이나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은 실제 사회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세상은 왜 이토록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인지 아무도 답변하지 못했다. 정의의 신은 모든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눈을 가리고 있다지만, 내가 믿는 신은 그저 단순히 눈이 먼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도와 절규를 듣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 신이여, 당신은 진정 있기는 한 겁니까? 있다면 대답이라도 좀 해 보세요. 네? 지금껏 저는 한 번도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당신을 본 적도 없는데 그저 당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부모님과 종교인들의 이야기를 믿어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심으로 의구심이 생깁니다. 사람조차 상대에 대해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신인 당신은, 최소한의 측은지심이나 공정함이라는 것을 가지고는 있는 겁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랬다. 교과서 밖의 세상은 십 수 년간 배워온 진리와는 정 반대였다. 살아 온 날들에 비례하여 가치관의 혼란은 점점 심해졌다. 지금까지 제도권 교육과 부모님으로터 받은 가르침은 근간부터 통째로 흔들렸다. 어둠은 빛을 가리지 못하며 진리는 거짓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 사필귀정이나 인과응보에 대해.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고, 착한 끝은 있으며, 신은 항상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다는 말에 대해. 그러나 내가 겪은 세상에서 지는 것은 단지 패배일 뿐이며, 착한 끝은 악인에게 짓밟히는 것이었고, 그 모든 과정에서 신은 방관했다. 신은 늘 성공하는 자의 편이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자의 편이었다. 약자를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거나, 뒷짐 진 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의 모상을 따 인간을 빚었다지만 어쩌면 신을 닮은 것은 생김새만이 아니라 귀찮음을 회피하는 성정까지 닮게 창조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가 진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였을까. 저런 격언들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약자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말은 아닐까. 더 강하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도 부침이라는 것은 있게 마련이니 그들이 잠시 하강 기류를 탔을 때 역시, 저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는 거였어,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거였어, 하고 자위하기 위해서. 그러나 가진 자들은 고통에서도 금방 벗어났고 이내 원위치를 회복해갔다.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가 응시하는 가난한 십자가 위에 신은 없었다. 생이 있는 곳에 항상 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킹 머튼은 “무릇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라는 마태오 복음 25장 29절에 착안하여 ‘마태 효과(Matthew Effect)’ 라는 사회경제학 이론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부익부 빈익빈을 이론화 한 셈인데, 종교 교리보다 공감되는 이론이었다.



미국 넷플릭스 사에서 만든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는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 위해 권모술수와 악행을 마다않는 냉혈한 정치인 프란시스 언더우드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흙수저' 출신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진심으로 신을 믿지 않는다. 아니, 신을 믿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믿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가 기독교인인 미국 사회의 표심을 위해 하느님을 믿는 척 한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하느님과 단둘이만 있고 싶다고 하는데, 신부님이 나가자 "사랑으로 나를 설득하지 말라"며 십자가의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순간 갑자기 십자가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는 신 혹은 절대자의 준엄한 경고와 묵시적 저주가 드러나는 순간. 살인을 하고서도 동요 없던 프란시스조차 당황하여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친다. 이 드라마에는 서늘한 장면들이 적잖이 나오지만 어떤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보다 더 잔혹하게 느껴졌던 대목이다.


믿음이 약해서인지 기도에 묵묵부답인 하느님이 미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틈만 나면 신을 의심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신은 알 것이다. 나의 의심은 사실 신을 믿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의 반증이자 신이 내 의혹을 잠재워주기를 바라는 애끓는 부탁이자, 나에 대한 신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처절한 시도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 모든 번민은 사실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믿고 싶기 때문에, 신이 있다는 사실을 신이 나에게 몸소 증명해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것이다. 비단 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나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이자 내가 의탁하고 싶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늘 이렇다.


누가 신인가? 종교인에게는 그 종교의 절대자가 신이지만, 아이에게는 부모가 신이고 갓 학교에 입학한 학생에게는 선생님이 신이며 물질주의자에게는 돈이 신이고 사랑에 눈 먼 연인들에게는 자신의 연인이 신이다. 자신이 섬기는 존재, 무조건적으로 믿고 싶은 존재, 세상에서 가장 완전무결하며 흠없는 존재. 그 존재의 무력함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 인류의 문명이 이 땅에 펼쳐진 이래 가장 잔인한 학살과 가장 거룩한 희생이 모두 신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다. 절반쯤의 의심과 절반쯤의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한다. 오늘도 조용한 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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