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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un 02. 2018

꽃들에게 희망을



5월이 지나갔다. 5월은 꽃의 계절이었다. 철쭉과 라일락 향이 어느새 사라지고 봄철에 피는 들국화들이 시들어간다. 그러나 꽃과 함께 만개했던 마음은 여전히 활짝 피어 여름을 기다린다. 연둣빛 잎들이 진한 초록을 갈무리하려 힘을 응축하는 것이 보인다.



6개월쯤 꽃꽂이를 배웠다. 그 때도 가장 많은 꽃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5월이었다. 결혼식이나 각종 축하연이 많으니 꽃시장에 다양한 꽃이 풀리기도 하고, 실제로 이 시기에 봉우리는 터뜨리는 꽃의 가지수가 많기도 하다. 제법 몰입해 배웠던 탓인지, 지인 중에는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꽃꽂이로 전업한 줄 아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꽃이라는 것은 그런 힘이 있다. 대충 배치해 놓아도 아름다운 것이다. 길가에 핀 들꽃이 누가 배열해서 심지 않아도 탄성을 자아내는 것처럼, 그 존재 자체로도 아름답고, 한 송이만 있어도 아름답고, 군집을 형성해 피어 있으면 더 아름답다.


꽃이나 재료를 사 오는 것은 선생님의 몫이었고 나와 같은 수강생들은 강사가 가져온 재료를 커리큘럼에 따라 손질해서 꽂기만 하면 되었다. 매주 선생님이 어떤 꽃을 가져올 지 알 수 없었기에 매 수업마다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져오는 꽃들은 비전문가인 내 눈에 ‘예쁜’ 꽃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예쁘고 화사하고 꽃망울도 큼직한 꽃들만 꽂으면 좋을 텐데 선생님이 가져오는 다발들 속에는 꼭 왜 있는지도 모를 어둡고 칙칙한 색의 꽃들이나 다소 우악스러워 보이는 나뭇가지, 흔하디 흔한 잡초처럼 생긴 초록 이파리들이 끼어 있었다. 작약이나 장미나 백합같이 ‘폼 나는’ 꽃들만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꽃꽂이를 하다 보면 꽃의 특성을 알게 된다. 리시안셔스나 양귀비는 줄기가 너무 약해 오아시스(수분을 유지해 주는 스티로폼 블록)에 꽂기가 어려웠다.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조심조심 꽂다가도 자칫 힘을 잘못 주면 뚝 부러지곤 했다. 부케로 인기 있는 작약은 수명이 짧은 대표적인 꽃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봉오리를 꽂아 놓아도 하루 이틀이면 만개했다가 시들어버리곤 했다. 꽃의 외양도 다 쓰임이 다르다. 수국, 카네이션, 천일홍과 같은 밝은 꽃들만 꽂아 놓으면 꽃이 살지 않은다. 보랏빛 맥문동이나 자줏빛 스카비오사같은 어두운 색의 꽃이 함께 배치될 때 그 꽃들의 해사함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큰 봉오리만 꽂혀서는 서로의 꽃을 가리기 때문에 중간중간 작은 꽃봉오리들이 필요했으며, 꽃만으로 가득 차서는 제대로 만개할 수 없기에 공간마다 초록 잎들이 들어가야 했다. 초록이라는 빛깔은 꽃들을 더 생기 있고 맑아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거칠어 보였던 나뭇가지 옆에서 꽃들은 대비되는 산뜻함을 뽐냈으며, 연둣빛 이파리들과 어우러진 분홍이나 주홍빛의 꽃잎들은 서로가 서로를 더 싱그럽게 보이게 했다. 너무 가지런히 높이를 맞춰 꽂은 꽃들보다는 약간의 굴곡과 비대칭을 살린 꽃들이 훨씬 아름다웠다. 왜 필요한지 도통 알 수 없었던, 통제 불가의 덩굴 같은 꽃과 잎들은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흩날리며 어느 정원을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꽃꽂이의 작은 화기나 바구니 안은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내가 꽂는 꽃들에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투영시키며 꽂다 보면, 그것은 내가 다녔던 학교의 교실이 되기도 했고 회사의 사무실이 되기도 했다. 낯설고 복잡한 꽃들의 이름이 익숙하고 친근한 이름들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해 나갔다.


5월의 어느 날에는 꽃꽂이를 하다가 같이 듣는 친구와 장난을 치게 되었다. 꽃점을 쳐준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라일락 이파리를 어금니로 세게 물었다. 순간 혀가 얼얼했다. 그 이파리는 지금까지 먹어 본 어떤 약보다도, 어떤 풀보다도 썼다. 입안이 아릴 정도로 씁쓸한 그 맛은 하루 종일 초콜릿이며 사탕이며 모든 단 맛을 내는 음식을 동원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일락이 저렇게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쓰디쓴 이파리 때문이 아닐까 하고. 쓰고 아린 것들을 모두 이파리 속에 감추고 있기에 꽃은 저렇게 사랑스러운 향기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어떤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기는 하나, 그 아름다움이 너무 찰나의 것이라 아깝다고 말했다. 그것은 꽃꽂이를 해 본 적 없이 없거나 꽃을 제대로 본 적 없는 사람의 말일 것이다. 꽃은 가르쳐 준다. 꽃처럼 사람의 삶도 잎을 틔우고 봉오리를 맺고 어느 때인가에는 꽃잎을 마음껏 열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든 꽃들은 어딘가에 아픔 하나쯤, 가시 하나쯤을 품어야 저토록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피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쉬운 길보다는 굴곡진 길을, 넓은 문보다는 좁은 문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꽃에서 체득한다. 모든 꽃들의 개화 시기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제각각 다른 시간의 속도로 산다는 지혜를 꽃에서 배운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가장 나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꽃에서 얻는다. 나는 어떤 꽃일까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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