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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Oct 09. 2018

지도 연구반

중학교 때 우리학교에는 특별활동반이 있었다. 수요일 오후 마지막 시간은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연극반이며 사물놀이반, 축구나 테니스 반과 같은 매력적인 특별활동 가운데 나는 지도 연구반이었다. 준비물은 사회과부도와 마분지가 전부였다. 사회과부도에서 선생님이 지정해 주시는 페이지의 지도 위에 마분지를 대고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지도는 매일 바뀌고 우리가 그려내야 하는 국가도, 대륙도 바뀌었다. 지도 위에 표기된 지명과 설명까지 함께 기재해야 했다. 열대우림, 열대몬순, 냉대동계건조, 냉대습윤과 같이 기후를 기준으로 한 지도를 그릴 때도 있었고, 유럽지역이나 아시아 지역만 그릴 때도 있었다.


지도 연구반이 뭐야? 그런 걸 왜 해? 친구들은 깔깔대며 웃곤 했다. 다른 재미난 반으로 옮기자며 자신의 특별활동반을 추천하기도 했다. 확실히 지도 연구반은 인기가 없었다. 폐강의 위기가 있어 옮길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기실 두 가지에 집착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누락시켰다. 문자와 지도가 그 대상이었다. 책은 이야기를, 지식을, 보고 듣고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세계를 열어 주었다. 미지의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엄마도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해 주는 친구였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스승이었다. 책 속의 세상이 모두 지도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의 저자들은 지도의 국가 안에 있었다. 책이 흥미로우면 저자에 관심이 생겼다. 그가 사는 나라, 그가 속한 문화가 어떻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문자 안의 세상을 눈으로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도 있었다.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은 사회과부도나 백과사전의 지도와 사진을 보는 것으로 달랬다.


그 무렵 집에 책은 넘치도록 있었다. 오빠와 나의 웃음소리도, 엄마의 온기어린 애정도 넘치도록 있었다. 재력은 넘치지 않았다.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당시로는 드문 일이었다. 방학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을 즈음이면 으레 방학 중 한 일을 발표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곤 했다. 외국에서 살다가 전학을 온 친구가 있으면 쉬는시간마다 가서 말을 걸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못내 궁금했다. 물건마다 가리키며 그 나라에서 이건 뭐라고 하는지, 학교는 어땠는지, 집은 어떻게 생겼으며 길의 모양은 어떠한지 연신 의문문을 쏟아내던 나는 필경 몹시 촌스러운 아이로 비춰졌을 것이다. 호기심은 창피함을 앞섰다.


첫 해외여행을 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여행지는 태국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이국적인 향취와 함께 짙은 습기가 몸을 감쌌다. 알 수 없는 끈적함이 피부에 시종일관 느껴졌다. 다른 언어를 쓰는,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초목과 대기와 건물들도 모두 달랐다. 낯선 땅을 밟은 소녀는 모든 것이 신기해서 모든 것을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2박 3일의 태국 여행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 앨범 하나와 스케치북 하나를 빼곡히 채웠다. 여행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에 대해 공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썼다. 어린 날의 기록들은 이사를 다니며 소실되었으나 감정은 유실되지 않았다. 기쁨에 벅차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딸을 진정시키느라 엄마는 꽤나 힘드셨을 게다.


이제 해외여행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매년은 아니더라도 아끼고 저축하여 마음을 먹으면 2-3년에 한 번쯤은 원하는 나라로, 원하는 도시로 가서 나쁘지 않은 숙소에 일주일 쯤은 머물 수 있다. 저가 항공사와 공유경제의 발달로 항공권이나 숙소도 전보다 훨씬 값싸게 구할 수 있다. 누군가의 여행 소식에도 눈 맞은 강아지처럼 흥분하지 않고 덤덤히 대응한다. 그래도 기회가 마음껏 주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해외여행은 늘 설레고 감사하다. 어디를 갈 지 고민하고 계획하는 시간만큼 여행은 길어지는 기분이다. 이 시간이 여행의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신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터넷과 각종 SNS의 발달로 온갖 여행기와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내가 그리는 그 나라, 그 도시, 그 지역에 대한 글과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 여행은 시작된다.


여행을 다녀온 뒤는 마치 눈이 온 다음날과 같다. 마법같은 시간은 사라지고 흔적만이 남아 있다. 검은 물이 곳곳에 고여 지저분해진 길처럼 트렁크에는 빨랫감이 한가득 쌓여 있다. 추억의 잔해를 정리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여행의 종료를 알리는 현실 인식의 과정에는 휴가가 끝났다는 직장인의 각성도 동반된다. 복귀 첫날은 동료들에게 여행기를 읊어대느라 제법 신이 나고 정신없기도 할 터이다. 며칠 동안은 만나는 이들에게 묻지도 않은 여행 자랑을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들뜬 기분은 가라앉고 추억은 희미해질 것이다. 해가 지나면 올해는 또 어디를 갈까, 해외가 아니어도 괜찮지, 국내 어느 곳을 가 볼까, 지도를 보며 익숙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구글맵과 다음 지도, 네이버 지도 같은 비트세계의 지도가 길가며 상점의 간판 사진까지 보여주는 덕분에 상상 여행은 더욱 용이해졌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도 연구반 학생은 아직도 종종 지도를 연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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