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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an 05. 2019

20년 만의 재회

아이들은 자라서 아이가 되었다

(사진출처: i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거의 2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친구와는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중학교 내내 만나지 못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몇 달간 학원을 같이 다녔다. 그리고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정확히 셈을 하자면 18년 남짓이라고 해야겠지만, 시간을 10자리로 반올림한 만큼 반가움은 증폭되었다. 친구와의 재회에는 SNS가 큰 역할을 했다. 페이스북이며 인스타와 같은 SNS를 이따금씩 하기는 하지만 영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역할을 해 주기도 했다. 과연 '사회관계망'을 공고히 하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간 SNS 에 대해 가졌던 불신이나 회의감을 조금 덜게 되었다. ​

친구는 미국에서 공부중인데 가족과 새해를 보내기 위해 잠시 귀국한 것이었다. 일주일간 머무는 동안 짬을 내 준 친구가 새삼 고마웠다. 기술의 발달은 물리적 거리를 줄여 주고 드문드문한 궤적을 알 수 있게 해 주었기에 아주 대략적인 서사는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격차만큼 달라진 서로의 모습과 변화의 여정을 소상히 알려줄 수는 없다. 20년 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설렘과 기대가 교차하며 본 친구는 초등학교 때의 얼굴에 키만 큰 모습이었다. 20년의 간극이 무색하게 친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feat. 김동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것은 기술의 역할이 아니라 마음의 친근감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단어보다는 어릴적 친구나 소꿉친구라는 단어가 더 다정하게 다가온다. '소꿉친구'라고 할 만한 친구가 내게는 이 아이가 유일한 것 같았다. 소꿉놀이를 하거나 고무줄 놀이를 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뛰어놀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초등학교 때의 말갛고 호기심 많은 눈빛을 한 아이가 내 앞에 있었다. 조금은 개구지고 조금은 엉뚱한. 나 역시 마음 놓고 아이로 돌아갔다. 넌 정말 그대로구나! 키만 컸지! 라며 즐겁게 놀라는 내 모습에 친구는 조금 멋쩍어했다.
- 우리가 초등학교 때는 나름 친했잖아. 그런데 너고등학교 때 학원에서는 되게 까칠하고 새침했어. 그래서 좀 걱정했어.
- 내가? 그랬나?
- 응. 그런데 지금 보니 다시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다행이다.
- 고등학교 때는 내가 한창 사춘기에 스트레스도 많아서 그랬나봐.
20년의 세월을 세 시간여 만에 압축 정리하고 우리는 또 다시 기약없이 헤어졌다. 나의 성장과정을 이토록 소상히 알고 있는 친구가 몇 없다는 생각에 문득 친구가 고맙기도 하고, 이제 또 다시 만나려면 몇 년이 흐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어쩌면 그것은 서로의 기억속에 고정된 아이들과 현재 모습의 간극이 너무 커서 머리로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나풀나풀하게 뛰어놀기도 하고 까르르 웃고 재잘대고 장난치고 놀던 그 아이들이 이처럼 훌쩍 자라 커리어우먼이 되고, 박사가 되고, 혹은 사장님이 되거나 선생님이 되거나 연구원이 되기도 하고, 엄마아빠가 되어 있기도 하다. 스물 여섯 쯤에 조촐히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도 우리 중 몇몇은 무엇인가가 되어 있지만 다시 만나면 그 무엇도 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초등학교 동창회였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는 '우리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 우리는 자라서 어른이 되지' 라는 문장이 있었다. 함께 이 교과서를 읽었던 우리는, 무엇이 된 다음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무엇이 된 다음 만나도 그 '무엇'이 계속 바뀌기도 했다. 우리는 외관상 어른이 되어 만나기는 했는데 정작 만나면 순식간에 아이가 되었다. 당장 어제의 일도 가물대는 우리들은 아이일 때 했던 장난, 아이일 때의 별명을 모두 기억해냈다. 삶이 단조롭고 단순했을 때, 생계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상상과 공상과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 체면과 평판과 규범 같은 것 없이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무한정 내보일 수 있었을 때. 그 시기의 순수와 향수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적이기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가 소중했다. 언뜻 다른 사람처럼 변한 친구들도, 도장을 찍어 놓은 듯 똑같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우리가 서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너머의 아이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랐지만, 다시 아이가 되어 만났다.


오래 가는 관계란, 결국 그 무엇도 아니었던 때 시작된 관계인 것 같다. 무엇이 되기 이전, 무엇이 될 지 모르거나 무엇이 되기 위해 꼼지락거리며 분투할 때 만났던 사람. 생기발랄하고 꿈 많은 아이나 학생의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한 명쯤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온하게 느껴졌다. 수소문을 해 본다면 몇 명쯤 더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무엇이 되어 버려서, 그 중에는 마냥 아이의 모습을 보일 수만은 없는 사이도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름 동네에서 유명한 축에 들었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이 늘 부담스러웠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렇다고 홀홀단신 타지로 떠날 용기 같은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숨기 어렵게 만드는 SNS의 존재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피해 살아갈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 위해서는 결국 나 자신에게 더 충실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 된, 그리고 계속 무엇을 해 나가는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눈금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제는 짐이 아닌 선물같이 여겨진다. 20년 만의 재회를 다른 친구와 다시 하게 되더라도, 혹은 앞으로 20년 뒤에 이 친구를 만나더라도 계속 깔깔거릴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여받은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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