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딸에게 주고 싶었던 '모든 좋은 것'
노부인은 수년 전 상하이에서 샀던 백조를 기억하고 있었지.
"이 새는 거위가 되고 싶어서 목을 길게 뺀 오리랍니다. 잡아먹기엔 너무 아름답죠?'
장사꾼은 너스레를 떨었단다.
이렇게 백조와 여인은 수 천리 미국길을 함께 하게 되었단다.
여인은 백조에게 말하곤 했지.
"미국에 가면 나와 꼭 닮은 딸을 낳을 거야.
그 곳이라면 남편 트림 소리로 여자를 평가하진 않겠지.
내 딸에겐 완벽한 영어만을 시키겠어.
슬픔같은 건 절대 맛보지 않게 될 거야.
소원 이상이 되어 버린 이 백조를 주면 내 뜻을 알겠지."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그녀는 백조를 빼앗기고 말았어.
남은 건 추억이 깃들은 백조 깃털 하나 뿐이었지.
그녀는 남은 깃털을 딸에게 주며 말하고 싶었어.
비록 보잘 것 없는 깃털이지만
내 희망을 담고 있노라고.
영화 <조이 럭 클럽 >, 감독 웨인 왕, 1993, 미국
삶이 유독 지치고 힘들어 어디엔가 기대고 싶은 날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고민과 혼란이 쌓여 엉엉 울기라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댈 곳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개개인의 삶은 그 고유성이 짙어져서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 또한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삶의 고비를 넘어야 할 때나, 삶이 주는 과제를 해결하는 것도 혼자만의 몫인 경우가 늘어간다. 이런 막막함과 애통함을 해결하고자 하는 심원이 종교나 문화, 예술을 발달시킨 원동력의 하나라고 믿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 같거나 낭떠러지에 선 기분일 때 나는 주로 영화나 책에 기대어 쉬기에.
삶을 다각도, 다방면에서 조망하여 여러 경우에 해답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조이 럭 클럽> 은 그런 영화 중 하나라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마다 종종 꺼내어 보게 된다. <조이 럭 클럽>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영화이자 가족과 사회에 대한 영화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이자,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 사회가 발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부조리가 만연해 왔는지, 여성의 삶이 얼마나 오랫동안 도구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자, 모든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곳곳에서 나는 뜻밖의 위안을 얻고 해답을 찾곤 한다. 영화에는 네 모녀가 등장하는데, 유독 자주 기억나는 것은 두 모녀의 이야기다.
1. "사랑받아야 할 네 자신을 찾아야 한다" - 엄마 잉잉과 딸 레나의 이야기
남편의 외도로 인한 극단적 분노를 참지 못했던 여자는, 남편에 대한 증오로 순간 정신을 잃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손에 들린 자신의 아이, 그러나 숨을 쉬지 않는 아이였다. 아이를 잃고, '영혼을 잃은' 여자는 자신의 딸에게도 영혼을 심어주지 못했다. 자아를 잃은 어머니를 보고 자란 딸 역시 자아를 갖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정체성 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맞추며 살아온 딸은 왜곡되고 뒤틀린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뒤늦게 딸의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발견한 어머니는 자책한다. 딸이 영혼과 주체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친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리고 이미 자녀를 잃어본 어머니는 이 딸의 영혼마저 잃을 수는 없기에.
어머니는 딸에게 묻는다.
"결혼생활에 있어 네가 남편에게 원하는 게 뭐냐."
"존중과 다정함이요(Respect... Tenderness...)"
"원하는 걸 주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사랑받아야 할 네 자신을 찾아야 한다."
2. "넌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있어." -엄마 안메이와 딸 로즈의 이야기
반쯤은 강요에 의해, 반쯤은 고정관념에 의해 어머니는 온 삶을 희생으로 살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모르고 타인의 바람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던 어머니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주체적인 선택은 스스로 삶을 끊는 것 뿐이었다. 어머니의 극단적 최후는 딸의 분노를 자극하고, 딸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된 딸은, 자신의 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희생과 침묵으로 점철되어 자아를 잃은 모습을.
"넌 우리 엄마와 같아.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있어.
난 중국식으로 자랐어.
욕심 내지 말고 불행을 속으로 삭이라고 배웠지.
딸도 마찬가지가 됐어. 결국 한 방향이지.
우리 엄마가 자신의 가치를 알았을 땐 늦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어.
너도 그렇지 않을 수 있어."
존중받을 권리, 나의 가치를 아는 것.
이것이 비단 결혼이나 가정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만큼 대단한 진리도 아닌 것 같은 단순한 것들이지만 실제로는 종종 놓치고 있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모든 상황과 모든 삶에서 귀기울여야 하는 보편적 메시지. 무언가 잘못되고 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아래 묻혀 있는 진실은 훨씬 방대하기에. 진실을 모두 보거나 모두 알 수는 없다 해도 그 핵심만 알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핵을 둘러싼 환경은 무성할지라도 핵 자체는 자그마한 것이라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영화 속에서 어머니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했다. 미지의 세계와 낯선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 현재 속한 곳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될 때, 사람은 한없이 용감해진다. 그 용기가 그들을 망망대해 건너편의 이국 땅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은 한 때 딸이었다. 딸들은 자라서 어머니가 된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감정, 경험, 관습을 어머니들은 딸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약한 것은 슬프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급증하고 여권이 신장된 것은 분명하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 지도자가 등장했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약자이다. 더 많은 보호와 돌봄을 필요로 하고,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 위치는 늘 위협받는다. 각종 범죄와 질병에 늘 취약하다. 남성에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끼치는 병증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으며,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여성이 남성보다 강한 것은 정신력 뿐이다. 그 또한 정신력이라도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 증가하는 이유는 아마도 학업과 소득과 직업만이 여성의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존재와 지위를 보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믿을만한 수단' 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성들을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내모는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한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딸들은, 그러나 어머니들의 간절한 몸부림을 피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같은 고통을 답습하고, 어머니가 제발 그것만은 피하게 하고 싶었던, 바로 그 길을 가기도 한다. 지치고 상처받고 만신창이가 된 딸의 영혼이 돌아와 기댈 곳은 역시 어머니 뿐이다.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 곳에 있는 것은 그토록 내달려 왔던 성취도, 연인들의 금방 스러져 버릴 맹세도, 상아탑의 영광이나 재물의 금빛 첨탑도 아닌,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인 것을.
어머니가 딸에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회한과 인습, 그리고 반드시 전해주고 싶었던 희망과 사랑,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그 깃털에 담겨 있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삶에 그 깃털 하나를 살그머니 꽂아 두었다.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을 때, 도저히 바로잡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생을 부여하는 그 작고 작은 깃털의 묵직함과 거대함을. 어머니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고뇌가 쌓여갈 때, 나는 어머니가 내 삶에 꽂아 놓았을 그 깃털 하나를 상상한다. 보드랍고 기분 좋은 솜털의 살랑임과 거기에 내재된 희망의 무게를. 눈물을 닦아주는 포근한 눈길과 나의 행복을 바라는 애틋한 염원을. 그러면 그 작고 하얀 깃털은 커다란 날개가 되어,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