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베프'를 소개합니다

by 데이지

집에 돌아오면 습관처럼 소파에 몸을 파묻고 <길모어 걸스>를 본다. 몇 번째 되풀이해 보아도 지겹지 않다. 길모어라는 상류층 가문에서 미혼모가 된 엄마와, 그 딸의 이야기다. 열여섯에 아이를 낳은 엄마는 가끔 딸보다 철딱서니가 없다. 그래도 딸은 매 순간 엄마를 찾는다. 딸의 생일파티가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엄마는 딸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 친구 로리를 소개합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 딸은 아버지와 다툰 엄마에게 말한다.

"난 엄마편이야. 엄마가 옳고 아빠가 틀려서가 아니라 무조건 엄마 편이야."

심각한 범죄를 일으켰거나 민형사상 배상의 책무가 있는 행동에 속하지 않는다면, 신변잡기적인 갈등은 대체로 주관적이다. 설령 내 귀책사유임이 확실하더라도, 가끔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엄마와 딸은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결국은 서로의 편이 되어준다. 사실 판단의 영역과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는 영역은 분리된 것이다. 엄마 뒤에는 내가, 내 뒤에는 엄마가 있다. 무조건.


이런 대상을 보통은 '베프(best friend)' 라 칭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의 '베프' 였다. 그런데 원래 절친이란 역설적인 관계이다. 가장 친밀하면서 가장 냉정하고,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많이 다투기도 하는 것이다. 냉전은 일주일이 넘게 이어지기도 했다. 서로에게 투명인간인 척 하며 자존심을 내세우는 시간이 며칠이고 계속됐다. 중간에 낀 아버지와 오빠는 눈치를 보며 답답해 했다. 여자들의 복잡미묘한 감정과 섬세하고도 세밀한 갈등의 양상을 남자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단편적인 조각을 이어붙이는 것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같은 편이 되어 소파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이쯤하면 이해하지 말고 외울 때도 됐는데.


엄마는 오늘도 딸에게 할 이야기가 끊임이 없다. 쇼핑몰에서 할인하는 옷을 29000 원에 구입했다거나, 화분에 물을 주는 방식을 달리했더니 더 잘 자라는 것 같다거나, 오른쪽 어깨 통증이 계속 낫지 않는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다. 대단한 사건이 벌어졌거나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도 대화는 좀처럼 끊기지 않는다. 딸 역시 엄마에게 할 말이 한가득이다. 오늘은 회사에서 중요한 행사를 무사히 마쳤으니 당연히 이야기를 해야 하고, 흡족했던 구내식당 점심메뉴와 영 계획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 ppt 이야기도 한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식욕이 감퇴되지 않는 고충을 이야기하고, 너는 늘 식욕이 줄지 않으니 그냥 포기하라는 조언도 듣는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전화를 끊으며 말한다. "내일 다시 전화할게."


언젠가는 엄마가 될 지도 모른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두렵다. 나이는 들어가고 체력은 내려가는 것이 두렵고, 나 한 몸 추스르기도 정신 없는데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두렵다. 스스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 두렵고, 나의 단점을 자녀가 닮을까 두렵다. 무엇보다도 엄마같은 엄마가 될 수 없을까 두렵다. 한편 엄마를 생각하면 용기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엄마는 내 best friend 인데, 정작 엄마에게는 베프가 없었을 것이기에. 엄마 또한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길을 혼자 힘으로 개척했어야 할 것이기에.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지만 지금의 나보다 훨씬 현명하게 역할을 수행해 왔기에.


"엄마는 누가 가르쳐 줄 사람도 보고 배울 사람도 없었어. 그냥 너희들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 하나였지. 그러면 그냥 다 하게 돼. 지나고 나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만 그 때는 다 하게 돼."

어쩌면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은 정답이 없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자연히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엄마의 역할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덜 걱정하고 더 꿈꾸려 한다. 아직은 딸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에 안도하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이 럭 클럽 - 이토록 묵직한 깃털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