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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ug 05. 2018

샐러던트의 추억 2화: 자기 없는 자기 소개

MBA 첫 수업 시간

그렇게 '샐러던트'가 되었다. 광화문 회사에서 신촌 학교는 먼 거리가 아니었으나 퇴근길 러시에는 늘 길이 막혔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수업을 듣다 보면 피곤이 몰려 왔다. 집에 돌아갈 때쯤이면 종아리가 퉁퉁 부어 걷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시험과 과제는 왜 이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시험 날 하필 야근이 겹쳐 울먹이며 시험에 지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을 다닌 것은 몇 번을 돌이켜 보아도 잘 한 결정이었다. 기억에 남는 수업과 감사한 교수님들은 많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느 수업의 자기소개 시간이다.
 
MBA의 어느 수업 첫날이었다. 자기소개를 ppt 로 준비해 오는 것이 과제였고 사람들은 성실히 자기 소개에 임하고 있었다. 듣다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자기' 소개가 아닌 '회사' 소개에 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자신의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경영 이념과 주력 상품은 무엇인지, 자신이 이 회사에서 담당하는 직무는 무엇이며 향후 목표는 무엇인지. 몹시 혼란스러웠다. 내가 지난 시간에 잘못 들었던가? '자기' 소개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다니는 회사' 소개였던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회사와 자신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거나, 회사를 빼고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두려워졌다. 회사 밖의 나는 내가 아닌가. 반에서 가장 어린 축에 들었던 탓에 아직 패기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PPT 를 화려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었으나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파스텔톤의 글씨로 커다랗게 이름 석자를 쓰고 '회사 밖'에서 찍은 사진을 잔뜩 넣었다. 나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가 재직하는 곳에 대한 서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회사 이야기가 내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도록 회사는 나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임을 분명히 해야 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겠지만, 나는 결코 '튀는' 사람이 아니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당장 대학교나 고등학교 강의실에 들어가서 자기소개를 해 보라고 하면, 긴 준비 시간을 주지 않아도 발랄하고 창의적인 자기 소개가 쏟아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수업에서는 상당히 인상깊은 자기소개였던 듯하다. 평균연령 40을 넘었던 MBA 강의실에는 조직과 개인을 분리하기 어려운 경제활동의 주체들이 모여 있었다. 학업마저 경제활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물론 자기 소개에서 회사의 비중이 커졌다고 하여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회사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며, 7일 중 5일을 그 조직 중심으로 생활한다. 주말, 여가, 휴가와 같은 단어가 의미있는 것 또한 일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가 없었던 자기 소개 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백문백답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의 취미라던가 성격 정도는 공유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과 수업을 듣는 것인지' 가 먼저였고 '어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수업을 듣는 것인지'는 그 다음이었다. 다양한 회사와 업종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수확이었지만 그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를 알았다고 해서 그를 더 잘 알게 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소속 회사는 학기 초 나눠주는 원우 수첩에도 기재되어 있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회사가 궁금해지면 수첩을 찾아봐도 되는 것이다.


만약 10년 후의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조직의 중추로서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 회사에 대해 설명하게 될까.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라운 사람이 나일 것이다. 졸업한 학교들은 물론, 대학시절 몸담았던 학보사, 재직하는 회사, 잠시 인턴생활을 했던 S 기업에까지. 그 조직의 일원이 됨으로 인해 얻는 자부심은 소중하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일원이라는 사실로 인해 조직의 가치가 올라가면 좋겠다. 직장에서 얼마나 높은 사람이 되어 있든, 여전히 내 이야기를 하고 내 소개를 하고 싶다. 직장과 직함을 걷어내도 나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고 싶다. 나와 조직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원한다.
 
회사를 다니며 대학원을 병행하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아깝지 않을 만큼 보람된 일이기도 했다.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연륜을 쌓은 원우들은 어린 동기생에게 지혜도 덤으로 나누어 주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평탄히 가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녹록치 않은 순간이 닥치게 마련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날들이 이어질 때면 대학원 첫 수업시간을 생각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러면 다시 힘이 솟아난다. 해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자기소개를 하게 되더라도 매력적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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