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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Oct 30. 2018

토익 시간 도둑

9월 30일, 토익 시험을 보러 갔다. 몇 년만인지 모른다. 시험을 등록해 놓은 사실을 깜박해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어야 했다. 그것이 평소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게으름 피울 권리'를 앗아갔다. 시험 하루 전날 카톡 알림이 울렸고, 시험 당일 아침에 햄릿에 빙의하여 to take or not to take 를 고민하던 찰나 카톡으로 수험표가 날아왔다. 4만 원이 넘는 시험 응시료가 생각났다. 설령 점수가 기대 이하라고 해도 응시료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경제관념이 퍼뜩 살아났다.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필기도구가 연필이던가 컴퓨터용 사인펜이던가? 신분증은 챙겼나? 수험표는 프린트해가지 않아도 괜찮던가? 시험보기 편하려면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할까? 현관에서 맴돌다가 다시 10분이 흘렀다.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샤프와 샤프심과 지우개를 사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출근하던 방향으로 지하철을 탔는데 시험장은 반대 방향이었다. 다음 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바꿔 탔다. 이렇게 또 10여 분이 추가로 소요되었다. 가까스로 고사장에 도착하니 숨이 찼다. 


취준생 시절 토익을 응시할 때에는 한 문제 한 문제에 심혈을 기울여 풀었다. 정답이 엇갈리는 문제와 오답을 쓴 문제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고 속이 상해 밤새 뒤척이기도 했다. 11년차 직장인은 절박함이나 절실함을 잃은 지 오래다. 심드렁하게 문제지를 응시하며 끝나고 뭐 먹지, 고민한다. 토익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몇 년 사이 토익은 제법 길어지고 어려워진 것 같았다. RC 영역의 후반부로 갈 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집중력이 바닥을 치며 거부감이 고개를 들었다. 일요일 아침에 이게 뭐하는 짓이람! 


시간이 부족할 것만 같아 속이 타기 시작했다. 시험을 등록한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에서 권장하는 올해의 이수학점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익 900 점을 넘기면 연간 이수학점을 채울 수 있다. 입사할 때 성적을 생각하며 만만히 본 것이 문제였다. 공부를 할 시간은 충분했지만 공부를 하지 않을 핑계는 더욱 충분하다. 시험 종료 15분 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아뿔싸. 시간이 부족하다. 시험 보러 오는 길에도 시간이 부족했는데 또 부족하다니. 


따지고 보면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현대 문명은 끊임없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시간은 오히려 더욱 부족해진다. 시간을 아끼라고 하지만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시간맞춰 시험장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마음 편히 커피숍에 들어가 일요일 오전의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시험임을 깜박했더라면 달콤한 주말의 늦잠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잠이 덜 깬 머리와 절박함이라곤 없는 정신으로 이토록 산만하게 시험을 응시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어릴 때 읽었던 미카엘 엔데의 '모모' 라는 책이 생각났다. 시간 도둑들이 시간을 자꾸 훔쳐가고 어린 소녀 모모가 이를 되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친다. 시간 도둑들은 순진한 사람들을 꾀어 시간을 빼앗아 간다. 근면성실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소시민들은 저축이라는 키워드에 쉽게 현혹된다. 시간을 쌓아 무엇하지?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토익 고득점을 위해서는 시간 분배를 잘 해야 해요. 대학교 때 수업을 들었던 토익 학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런데 시간을 아껴 토익 점수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다른 것과 등가교환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선물이므로. 그 시간을 가치 있게 쓴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이다. 그러므로 나의 소중한 일요일 아침을 토익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허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다짐하는 순간 갑자기 토익 종료 5분 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친절한 목소리로 교실에 울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릿속이 울리며 나도 울고 싶어졌다. 시간 도둑이 내 시간을 훔쳐간 것임에 틀림 없었다. 앉아 있느라 좀이 쑤신 것과는 별개로 시험은 너무 빨리 종료되어 버렸다. 머리가 느끼는 시간과 몸이 체감하는 시간의 격차가 이다지도 클 줄이야. 점수가 언제 발표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점수 발표 하루 전날 밤, 또 카톡 알림이 왔다. 나를 좀 내버려 둬! 아 그런데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시간 도둑을 잡고 보니 범인은 결국 나였던 셈이다. 


토익은 간신히 900 점을 넘겼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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