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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Nov 03. 2018

'나'는 소중하다

2004년의 이야기


방금 마감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있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습 시험 1차 합격자 결과는 언제 알 수 있나요?”
마음 졸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그 학생을 생각하니 문득 고3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 때 모 대학의 수시모집에 탈락해 모니터에 '죄송합니다. 불합격입니다' 라는 문구가 떠 있던 것을, 그리고 그 순간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던 절망감을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세게 얻어맞은 듯한, 일종의 배신감까지 드는 기분. 슬퍼서가 아니라 분하고 어이없어서 흘렸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거절의 표시였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두려운 경험이었다. 건방진 얘기지만 사립 초등학교 추첨에서 고등학교 입시, 각종 대회에 이르기까지 나는 낙방해 본 적이 없었다. 오만할 대로 오만해져 있던 내가 정작 최고의 가치를 두고 지향하던 대상은 최초로 나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던 자신감과 자부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한동안 ‘나는 하잘 것 없고 부족한 존재’라는 열등감에 늘 짓눌렸고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덧 나는 고학번 대열에 끼게 됐다. 과거 때문에 주저앉아 있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된 것이다. 이제 3년 전 대학 입시 때문에 흘렸던 눈물을 생각하면 빙긋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 곳에 ‘불합격’ 한 것은 곧 다른 곳에 ‘합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었을 뿐인데 뭘 그리 조바심 냈던 건지.
고등학교 때 읽은 수필 중 김소운의 ‘특급품’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비자반으로 만든 바둑판 중 특급품으로 분류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 번 흠집이 났다가 원상복구 된 바둑판이라는 내용이었다. 아무 흠집도 없는 나무보다는, 흠집을 자력으로 유착시킬 수 있을 만큼 탄력 있고 강한 나무가 더 높은 등급이 속하는 것이다. 세상 모르고 살아왔던 내게는 그 유연함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제 겨우 스물 두 살. 앞으로 삶 속에서 내가 동경했던 것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대학 입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실패 따위는 두렵지 않다. 어차피 그런 경험 속에서 나는 발전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이상에, 아니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도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나는 너무 젊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2004년 5월, 학보사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절이었다. <상록탑> 이라는 부장 기수의 칼럼에 썼던 글이다. 고작 대학교 3학년이었지만 부장이었고, 고참이었으니 제법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우연히 당시의 글을 보니 당시의 나는 생각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였을 수도 있다. 대학 입시 정도에 저렇게 좌절했었다는 사실에 픽 웃음이 나긴 하지만.


이 이후에도 많은 거절을 경험했고 많은 실패를 겪었다. 고난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고난이 헛될까 두려웠다. 내가 겪은 어려움의 시간만큼 더 잘 숙성되어 더 깊이있고 더 온유하고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어떤 상황에서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아직도 나는 임원회의 때 ppt를 잘못 넘긴 것을 며칠 동안 자책하고 사내 게시물의 글자 크기가 작을까 봐 몇 시간을 수정한다. 좋게 말하면 꼼꼼하고 정직하게 말하면 소심한 성격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대범하고 화통한 사람이 되려는 결심은 늘 지켜지지 않는다. 남에게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는 자주 화를 내는 결벽도 고쳐지기 힘들다. 어쩌면 나는 이런 나부터 품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0여 년 후의 나는 이 글을 볼 때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어느 시점에서 돌아보든 과거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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