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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Dec 13. 2018

루돌프 사슴코

'그 후' 에서야 사슴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네

저작권 때문에 캐롤을 잘 틀지 못한다고 한다. 가정용품을 파는 매장을 지나가다가 오랜만에 캐롤 메들리를 들었다. 북치는 소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산타할아버지 오셨네, 그리고 루돌프 사슴코. 언제나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캐롤치고는 가사가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다. 루돌프 사슴코는 미운오리새끼나 아기코끼리 덤보, 빨간머리 앤과 같이 모든 '별종' 으로 취급받던 것들, 한때 소외당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한번쯤 겪었을 지 모를 일들에 대하여.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한 달이 지나도록 엄마는 학교에 찾아가지 않았다. 갓 제도권 교육의 세계에 자식을 들여 보낸 모든 엄마들이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만 해도 생활기록부에는 부모님의 직업과 학력을 자세히 기재했다. 학력 혹은 직업과 소득이 비례할 것이라는 빅데이터적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데이터는 늘 예외가 존재했다. 엄마는 몸이 약했으므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만도 힘이 부쳤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자녀 교육에 무심한 엄마가 되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끼셨던 것 같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자녀인 나에게 표출되었다. 까닭 없이 자주 야단을 맞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밝히면 엄마에게 이중으로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계속 숨겼다. 여덟 살에 이미 다이어트는 마음고생 다이어트가 최고임을 깨달을 만큼 홀쭉하게 야위어 버렸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빨간 코를 가진 루돌프는  미운털이 박힌 것이 틀림 없었고, 아이들은 권력의 구도를 쉽게 간파했다. 서열에 대한 인지는 본능적인 것인 듯했다. '선생님이 미워하는 아이'는 보호의 울타리 바깥에 위치했다.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지만 어쩌면 '왕따'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 때 중간고사를 치르지 않았더라면.


썰매를 끌고 싶던 루돌프는, 그러니까 '선생님께 예쁨을 받고 싶었던 루돌프'는, 첫 학기 시험에서 내리 전과목 만점을 받았다. 산타가 루돌프를 다시 평가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학교를 방문한 것은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였다. 엄마 입장에서는 막 입학한 아이가 이제 한 학기를 대충 잘 넘긴 것 같으니 엄마도 한숨 돌리고 선생님을 찾아 뵐 여유를 회복한 것이었다. 오빠의 학창생활을 이미 겪은 뒤니 크게 걱정되거나 신기할 것이 없었던 탓도 있다. 다행히 엄마의 무심함을 깊은 배려(?) 쯤으로 오해한 선생님 덕분에 더 큰 오해의 지속을 피할 수 있었다.


다른 오해는 피해야 하기에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나의 학창 시절 선생님들은 모두 훌륭했음을. 선생님들을 하도 좋아한 나머지 큰 키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맨 앞자리에 앉고 싶어 눈이 나쁘다는 핑계를 대곤 했음을. 그러나 어떤 개인도 다른 개인에게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듯, 어떤 선생님도 모든 학생들에게 완벽한 교육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로의 훌륭함을 발견하고 북돋아 줄 책임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 모두가 상호적으로 지고 있다. 이 테두리에 교육시스템이 존재한다. 비단 학교의 일이 아니다.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는 어느 조직에서든 쉽게 한 개인을 빨간코의 루돌프로 만들 수 있다. 그 루돌프에게 썰매를 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계발해 주는 것은 모두의 몫이 되어야 함을, '다른 모든 사슴들'은 너무 자주 잊는다. 루돌프 혼자 분투하기에 세상은 이미 너무 힘겹지 않은가.


캐롤이 사라진 거리에서 유물처럼 발견한 '루돌프 사슴코' 를 들으며 과거의 루돌프는 평범해진 코를 괜시리 한 번 찡긋 해본다.

그 후론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네.

루돌프 사슴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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