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유혜자 역(열린책들)
2018년의 마무리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건,
20여년 전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
그 느낌이 그리워서였다.
20년 후에 다시 만난 좀머씨는
여전히 죽음에서 도망다니느라 분주하고,
20년 전엔 보이지도 않던 책의 화자 꼬마는
좀머씨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훅 다가왔다.
마치, 십대 때는 데미안만 보이던 내가
사십대엔 싱클레어만 보이는 것과 같이.....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어도
누군가의 마음 속 좀머씨는
분주히 무언가를 피해다닌다.
그것이 죽음이든, 사람이든, 가난이든, 질병이든,
혹은 그 어떤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무엇이든
각자의 마음 속에 좀머씨는 부지런히 그 대상을 피하고 또 피한다.
나는,
내 안의 좀머씨는
무엇을 그토록 피하고 있는가?.....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 안의 좀머씨를......
나는
나의 좀머씨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한없이 못난 나의 어떤 부분을,
생각지도 못한 어느 순간 마주할까봐,
마주한 순간 주저앉아버릴까봐,
그대로 무너져내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될까봐,
나의 좀머씨는
그렇게 분주하게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저기요.
나의 좀머씨.
용기를 가져요.
자괴감의 강에 몸을 던지지 말고,
관조의 나무 위에 올라
평정의 햇살을 한껏 누리세요.
Inner peace.
내가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또 그렇게 철저하게 침묵을 지킬 수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혹은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들었던 그 신음 소리와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던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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