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민승남 역(한겨레출판사)

by 소연


고전학자이자 시인인 앤 카슨......
그녀가 시로 쓴 소설이라니......

단순히 제목이 좋아서 산 책이었다.
시로 쓴 소설이 도대체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론은........
아름답다.

시인의 언어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비정상(이라 흔히들 단정지어 버린것들)의 범주를 '특별함'의 범주에 스미게 한다.

빨간 괴물 게리온과
그를 죽이고 그의 모든것을 앗아간 헤라클레스가
현세에 다시 환생해 만났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리라.

읽는 내내 묘한 슬픔이 코끝에 매달리더니
책을 덮은 지금은
한없이 공허하다.

나 역시 등 뒤 어깨뼈 아래에
펴지 못해 굽어버린 작은 날개를 감추고,
빨강으로 물든 얼굴을 화장으로 가린
또 하나의 게리온인지도......






집 밖에서는 검은 1월의 바람이 하늘 꼭데기에서 평평해지며 내려와
창문을 거세게 때렸다.
-p.50-
차가운 밤 냄새가
차창으로 들어왔다. 초승달이 늑골처럼 하얗게 하늘 가장자리에 떠 있었다.
-p.65-
우리가 보는 별은
실제로 거기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글쎄, 실제로 있는 별도 있겠지
하지만 만 년 전에 타서 없어진 별도 있어.
난 그 말 안 믿어.
어떻게 안 믿을 수 있어. 다 알려진 사실인데. 하지만 난 그 별을 보는데. 넌 추억을 보는거야.
-p.101~102-
하늘 위는 늘 겨울이다. -p.124-
시간의 공포가 덤벼들었다. 시간이
게리온을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짓눌렀다. 그는 바깥을 보려고 작고 차갑고 검은 시간을 보내는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창밖으로 물어뜯긴 달이 눈雪의 고원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광대한 검정과 은빛의 무세계無世界가
공중에 매달린 인간들의 파편을 지나
불가해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서 그는 시간의 무식함이
자신의 머리통 위에서
포효하는 걸 느꼈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통 가장자리에서 반짝거리다가
날개 뒤 운하로 휙 떨어져
사라졌다. 한 남자가 시간을 통과한다. 작살처럼, 일단 던져지면 도착하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P.129-
색깔이 내는 소음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기 시작한 해였다. 장미들이
정원에서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는 밤에 침대에 누워 별들이 내는 은빛이
창문 방충망에 충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과학 과제를 위해
그가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낮의 태양 아래서 산 채로 불타는
장미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고 시인했다. 말 울음소리 같아. 게리온이 이해를 돕기 위해 말했다.
전쟁터의 말 울음소리.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p.134-
게리온은 방파제에서 어슬렁거리는 작은 페루인 여럿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아무것도 아닌 걸 쳐다봤다.
다들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게리온이 말했다. 뭘 기다려? 앙카시가 물었다.
그래 뭘 기다려. 게리온이 말했다.
-p.201-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그는 머릿속을 더듬는다—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서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너도 알잖아—멈춘다.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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