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찬/휴머니스트
한 때 문학소녀였던 나는 시를 참 좋아했다. 서리서리 짙초록의 서정주가 좋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윤동주가 좋았다. 산골 소녀 옥진이가 좋았고, 바다 내음 가득한 이생진이 좋았다. 그들과 그 밖의 이들의 시를 읽고, 필사하고, 때론 선물도 하며 마음 속에 버석함을 촉촉하게 적시곤 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다보니 무지개빛이었던 세상이 어느 새 회색으로 보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아마도 색맹이 되어가는 것인가보다.
한 해를 조금 더 말랑하고 따뜻한 맘으로 시작하고픈 생각에 고른 책. 읽고나니 제목이 참 중요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부제에는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 되어 있는데, 불혹을 후울쩍 넘긴 회색 시야의 아줌마 가슴은 차마 울리지 못했으니, 공대생보다 중년 아줌마 심장이 더 딱딱한겐가.
그래도 오랜만에 문학소녀 시절 읽고, 따라 적던 시들을 다시 만나고, 그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시인들 중 부인 하나만 둔 이 없다는 구절에 고개가 저어지고, 절절한 사랑노래가 실은 외도의 증거라는 것에 부아가 치미는 걸 보면 왕년의 문학소녀도 결국엔 배신한 년놈들에 바들바들 떠는 아줌마에 불과한 것을......
시대마다 유행하는 옷이 다르고, 노래 장르가 다르 듯 시의 언어와 형태도 달라진다. 어느 시는 시간을 뛰어넘어 가슴에 남지만, 어떤 시는 1, 2년이 지나면 오글거리고 읽는 이가 부끄럽다. 좋은 시와 나쁜 시라기 보다는 각자의 취향일테지. 요즘의 나도 아주 가끔씩 시집을 사곤 한다. 요즘 내가 꽂힌 시인은 박준과 권혁웅이다. 과하지 않은 표현과 담담한 시투가 좋다. 가슴에 깊이 들어오는 묵직한 무언가도 좋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가 교과서에서 보던(혹은 지금도 보는) 시들과 함께 옛노래들을 엮어 이야기했다면, 요즘의 시와 요즘의 노래를 엮어 <시를 잃은 그대에게>가 나오면 어떨까? 그렇다면 또 나는 제목에 낚여 열심히 읽어 볼 요량이 있는데 말이다.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 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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