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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Jun 15. 2022

버럭의 타이밍

둘도 없는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다 버럭해버렸다. 너무 뜬금없는 포인트에서의 버럭이라 그 친구도, 그 방에 같이 있는 또 다른 친구도 모두 당황했다. 버럭을 해놓고 맘이 불편한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종이에 붓펜으로 "결투장"이라고 쓰고는 사진을 찍어 올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 푸닥거리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고......

그 이후 둘도 없는 친구들과의 카톡방이 조용하다. 

그 일이 있던 날, 같은 톡방에 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나의 버럭은 좀 아닌 것 같다고. 버럭을 하려면 저번의 만남에서 했어야지 왜 오늘 버럭을 했냐고. 오늘은 누가 봐도 웃자고 하는 말이었는데 내가 잘못 한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아!" 하고 또 버럭해버렸다. 

평소같았으면 버럭을 시전하고 나서의 그 불편한 마음을 어찌할 지 몰라 혼자 동동거리다 이내 사과를 했을 나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다. 나의 버럭이 너무나도 뜬금없어 별 미친년 다 보겠네 싶어도 이번 만큼은 미안하다 먼저 말하고 싶지 않다.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문득 떠오르면 가슴이 터질 듯 뛰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직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왜 그랬을까? 왜 별 것도 아닌 일에 버럭했을까? 왜? 도대체 왜? 왜 하필 그 시점에?

하루에도 열 두번 그 날의 버럭에 대해 곱씹어본다. 열 두번의 두번은 그냥 참을걸... 후회하고, 나머지 열 번은 됐어, 어쩔 수 없어! 한다. 곱씹고, 또 곱씹으며 내린 결론은, '아, 그간 열심히 또 쌓아놨구나.' 이다. 


초등학교 때 부터 30년도 넘은 우정이다. 별 꼴 다 본 사이다. 때론 가족보다 편했고, 때론 나 보다도 사랑했다. 정말 죽고 못 살 사이다. 이렇게 격의 없는 사이에도 선은 있다. 처음엔 그 선을 몰라 서로 넘나들며 싸웠다. 그렇게 몇 번 싸우고 나니 그제서야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 여기까지는 농담으로 여길 수 있어,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아 하는 감정의 마지노선.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는 뜻하지 않게 그 선을 건드릴 때가 있다. 건드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슬쩍슬쩍 그 선을 건드린다. 차라리 확 넘어버리면 싸우기라도 할텐데,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슬쩍 건드려지면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분 나쁘다 말하기엔 전후상황이 너무 깔끔하고, 상처받았다 말하기엔 내가 너무 까칠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쉽게 감정을 표현하게 되질 않는다. 

선을 넘는 것이 살을 베인 것과 같다면, 선을 건드는 것은 작은 찰과상과 같다. 베인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살짝 피부가 벗겨진 정도의 상처도 쓰라리긴 매한가지다. 사람들은 그건 상처도 아니야, 뭘 그깟 거 가지고 아프다고 하느냐, 엄살이 심하다 라고 하지만, 똑같은 곳이 계속해서 쓸리면 어느 순간 곪고 터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 날의 별 거 아닌 어떤 말이 그동안 자꾸 건드려져 벌겋게 쓸려진 상처를 툭~ 하고 건드려 터지게 만든 도화선이었는지 모른다. 평소엔 잊고 지내다 슬쩍 선이 건드려지면 마일리지 쌓이듯 감정이 쌓인다. 얼마나 쌓였는지 모르는 감정마일리지는 이렇듯 뜬금 없는 어느 날 "서프라이즈~!!" 하고 터진다. 나도 상대도 정말 제대로 서프라이즈다. 


그 날의 나의 버럭은 정말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예민하고 까칠하기 그지 없는 속 좁은 년이 된 것일까?

내 친구들이 내 감정의 마지노선을 슬쩍슬쩍 건드렸듯 나 역시 그들의 선을 슬쩍슬쩍 건드렸을 텐데......

내 친구들은 나보다 마음이 넓고 깊어 아직 나에 대한 감정마일리지가 꽉 차지 않았던 걸까?

그러면 정말로 나는, 예민하고 까칠하기 그지 없는 속 좁은 년이면서 버럭의 타이밍조차 맞추지 못하는 눈치 없는 년인걸까?

그런걸까?

.

.

.

.

내 둘도없는 친구들과의 단톡방은 여전히 조용하다.

그 날, 내가 버럭했던 그 순간에 멈춰있다. 

톡방의 알림소리가 울리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울리지 않길 바란다. 

미안하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어떻게 첫 마디를 꺼낼까 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문득문득 불편한 마음에 심장이 크게 두근! 하고 가슴을 때린다. 


이렇게 나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버럭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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