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삶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길고 긴 여행 말이다.
시할머니와 함께 산 지 어느 덧 8년이 되었다. 할머니는 이제 갓 90을 넘기셨다. 당뇨와 혈압을 모두 갖고 계시지만 타고난 체질이 건강하신 터라(물론 할머니 본인은 본인이 가장 아프고 허약하다 생각하시지만.) 별다른 합병증 없이 잘 지내오셨는데, 4년 전 급성뇌경색을 앓으시면서 치매도 급 진행이 되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스럽진 않았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신다던지, 조금 전 하신 말씀을 까먹으신다던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이름을 얼른 생각해내지 못하신다던지 하는 어찌보면 사소한 깜빡 정도였다. 하지만, 올 해는 좀 다르시다. 아니 확실히 다르시다. 60년 전 일을 어제 일 처럼 말씀하시는가 하면, 죽은 동서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시고, 30년 전에 입었던 옷을 찾느라 옷장을 다 뒤지시는가 하면, 내가 할머니 옷장을 뒤져 옷들을 죄다 갖다 버린 것 같다고 작은 어머니께 전화해 이르기도 하신다. 사실 이런 일들은 아주 귀여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소식을 하시는 할머니께서 밥에 집착하기 시작하셨다. 간혹 내가 외출 할 일이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작은어머니, 우리 신랑 등등)이 한 끼 차려드린 날에는 내가 귀가하기가 무섭게 배고프다고 보채셨다. 아까 밥을 너무 조금 줘서 지금 너무 배가 고프다고...... 왜 밥을 조금만 드렸냐고 그 날 식사당번을 맡아준 가족에게 물으면 무슨 소리냐고, 밥 한 공기 가득 퍼드린 걸 다 드셨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이 떨어질 때 드시라고 사다 놓은 과자들을 약봉지에 가득 담아 서랍 깊숙한 곳에 숨기시고는, 때때로 내게 누군가 서랍을 뒤져 과자를 자꾸 훔쳐 간다고 하셨다. 안그래도 있었던 건강 염려증이 더 심해지셨고, 옛날 옛날에 드시던 약들이 생각나시는지 그 약을 타러 지금은 없어진 옛날 동네 병원을 가자고 자꾸만 조르셨다. 매사에 화를 내고 욕을 하셨다. 세상에 좋은 건 하나도 없고 온통 억울하고, 서럽고, 분통 터지는 일 뿐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요즘은 온통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차 있다.
TV를 보시며 고래고래 욕을 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본다. 할머니의 여행은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치매로 인해 멀고 먼 과거의 기억이 또렷해 지는 지금, 할머니의 기억 속엔 온통 서럽고 원통한 일들 뿐인데, 그렇다면 할머니의 이번 여행은 망한 셈인건가?
할머니 삶의 여정에도 행복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기쁘고, 설레고, 가슴벅찬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90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억겹의 순간들 속에 할머니만의 반짝이던 어느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블링한 순간들을 잊은 채 슬프고, 억울한 순간들만 남아버린 지금, 할머니의 굽은 등이 안쓰럽고 애처롭다.
할머니와 함께 살며 본의아니게 누군가의 늙음을 지켜보게 된 나는 할머니의 모습에 나를 투영해 보곤 한다. 나의 늙음은 어떤 모습일까? 내 여행의 끝무렵은 행복할까, 서러울까?
기왕이면 행복했음 좋겠다. 기왕이면 건강했음 좋겠다. 기왕이면 순응할 수 있었음 좋겠고, 기왕이면 내려놓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의 늙음으로 인해 내 가족이 힘들지 않았음 좋겠다. 나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게 될 그 날이 무섭지도, 아쉽지도 않았음 좋겠다. 흐릿한 기억들을 꼭꼭 붙잡아 내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한번씩 다 부르고 후회 없노라 웃으며 여행을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오늘도 안개처럼 뿌연 길을 걷는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그 길을 자꾸자꾸 뒤돌아 보며 걸어가신다. 뒤 돌아 보는 그 길에 나와 우리 가족이 환히 웃고 있는 걸 할머니가 기억하셨음 좋겠다. 할머니 혼자가 아니라는 걸, 우리가 할머니 뒤에 든든히 있다는 걸 할머니가 꼭 기억하셨음 좋겠다. 그로인해 할머니의 남은 여정이 조금은 행복하다 느끼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