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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Oct 22. 2023

시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1

올해로 시할머니와 함께 산 지 8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결혼생활 18년 중 거의 반을 할머니와 함께 산 셈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내게 대단하다고 한다. 시어머니도 아니고 시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동네 효부 중의 효부가 되었다.

“자기 정말 대단하다~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다니……!”

“너희 신랑이 너 업고 다녀야겠다. 요즘에 이런 와이프가 어딨니?”

사실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 마다 가슴 한 구석이 콕콕 찔린다. 나는 할머니를 모시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봉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열과 성을 다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냥” 같이 사는 거다.


할머니와 살림을 합치고 한 2년여는 많이 힘들었다. 서로 다르게 살아 온, 아니 다른 시대를 살아 온 두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집에 살게 되었으니 어느 것 하나 편한 것이 있었으랴. 다만 “처음”이 주는 약간의 설렘과 “처음”이라 생기는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평화를 안개처럼 깔아 줄 뿐이었다.

처음 며칠은 같이 사는 거 별 거 아니네 싶었다. 할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며 욕하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이정도면 아주 괜찮다 싶었다. 이후 몇 달은 어라? 했다. 성격부터 성향, 살림스타일과 육아관까지 다 다른 할머니와의 소리없는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다 들리는 혼잣말로 내게 욕했고, 나는 할머니 시야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아 숨었다. 그 이후의 날들은…… 힘들었다. 많이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로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그럴 때 마다 땀을 비오듯 쏟았다. 이유없이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가 이내 잠잠하기를 반복했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이놈의 눈물은 그칠 생각을 안했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놀라고, 힘들게 잠들었다가 한새벽에 번쩍 눈이 떠져 말똥말똥해지기 일쑤였다. 그 무렵 친구들이 혹시 갱년기 아니냐고 물었다. 아직 마흔도 채 안 된 나이에 무슨 갱년기냐 했지만, 몇 년 전 선근증으로 자궁적출을 하며 제 역할을 못하고 자궁에 유착되어 버린 한쪽 난소도 함께 떼어냈기에, 그나마 하나 남은 난소도 제 역할을 하기까지 몇 년 안남았다 했기에 혹시나 하는 맘에 병원에 가 진료를 받았다. 의사선생님은 증상만으로는 딱 갱년기인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 검사를 해보자 했다.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면 비슷한 증상이 나올 수도 있다 했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더니 선생님이 물으셨다. “혹시 직장에 다니세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오.” 선생님이 또 물으셨다. “그러면 시어머니와 함께 사세요?” 나는 또 대답했다. “아니…….”순간 눈물이 또 줄줄줄줄 흘렀다. 아무 생각 없는 표정에 또 눈물이 줄줄줄줄…… 선생님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네.” 하셨다. 그러고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네요. 초기 우울증이예요.”

평화는 안개와 같았다. 점점 짙어져 앞에, 옆에 뭐가 있는지 모르게 한다. 그리고는 쾅! 부딪히게 한다. 기어이 상처를 만든다.


원인을 알고 나니 갑자기 눈 앞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내가 못해서인 것 같고, 내가 못돼서인 것 같고, 내 성격이 못나서인 것 같았는데,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하니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그 때 부터 나는 할머니께 너무 잘하려 하는 것을 멈췄다. 애쓰는 것을 멈췄다. 효도해야지 하는 강박도 멈췄다. 그냥, 그냥 살았다. 잘하려 하지 않고 그냥. 너무 애쓰지 않고 그냥. 효도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다보니 8년이 지났다. 물론 그냥 산다고 해서 갈등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때 처럼 마음이 힘들어 몸까지 요동치는 그런 일은 없다. 내가 애쓰지 않는 만큼 할머니도 맘을 내려놓으셨다. 그래서 조금은 더 편하고, 조금은 덜 상처받는다.

아직도 우리는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서 있지만, 조금씩 조금씩 중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보폭과 걸음수를 똑같이 맞추려 하지 않고, 서로의 속도와 서로의 걸음걸이로 조금씩, 천천히, 가까이, 가까이……


시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 그것은 이럴 것도 없고 저럴 것도 없는, 그냥 살아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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